오래전부터 패션은 결국 마음의 온도를 드러내는 일이라고 믿어왔다. 모두가 파괴와 아이러니에 열광할 때도 옷이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낭만적인 실루엣과 부드럽게 스치는 색, 단정한 테일러링 속에 깃든 인간적인 온기. 그것이야 말로 예측할 수 없는 어두운 현실을 견디게 하는 조용한 힘이었다. 요즘처럼 젊음이 너무 빠르게 변화를 요구받고, 감정보다 반응이 앞서는 시대일수록 그런 믿음은 더 간절해졌다.
그래서일까. 차가운 현실의 한복판에서 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의 이름이 다시 들려왔을 때, 나는 그가 만드는 세계가 이 혼란을 잠시나마 치유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로맨티시즘과 인간 중심 디자인의 아이콘으로 불리던 피치올리가 발렌시아가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차갑고 아이러니했던 하우스에 그가 불어넣은 건 의외로 ‘온기’였다. 문학을 전공했던 그는 옷을 문장처럼 다루고, 색채를 감정처럼 쓴다.
1999년부터 25년간 발렌티노에서 보낸 시간은 그에게 미학의 언어를 완성해 준 긴 여정이었다. 고전적 아름다움을 재정의하고, 풍부한 색감과 유려한 실루엣으로 로맨티시즘의 현대적 얼굴을 만들어냈다. 특히 ‘핑크PP’로 상징되던 발렌티노의 시절은 그가 감정으로 브랜드를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디자이너임을 증명했다. 이제 세상은 그의 다음 문장을 기대한다.
2026년 봄 여름 파리 패션위크에서 공개된 피치올리의 첫 발렌시아가 컬렉션. 런웨이는 파리 5구의 오래된 수도원 안, 천장 너머로 과거 뎀나 시절의 디스토피아적 사운드 대신 미니멀한 피아노 선율과 로린 힐의 ‘Can’t take my eyes off you’가 잔잔히 흘렀다. 탄생한 룩에는 역대 디렉터들의 아카이브를 모티프로 하우스의 전통을 존중하면서, 그 위에 현대 감각을 덧입혔다.
첫 번째로 공개된 룩은 심플한 블랙 드레스.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실루엣에 그의 시그너처인 로맨틱한 곡선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발렌티노의 그것과는 달랐다. 더 단정하고, 더 현실적이었다. 드레스 밑단에는 발렌시아가의 고전적인 ‘벌룬 셰이프’를 연상케 하는 볼륨이 새겨졌고, 그 위로 얇은 실크를 겹겹이 쌓았다. 피치올리의 발렌시아가는 이렇게 절제된 디테일 속에서 자신이 해석한 하우스를 말하기 시작했다.
이번 시즌 컬러 팔레트도 인상적이다. 발렌시아가가 한때 보여준 블랙의 공허함 대신 그는 퍼플과 그린, 버건디를 선택했다. 피치올리에게서 색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감정의 층이다. 액세서리는 절제됐고, 오버사이즈 백 대신 손에 쥘 수 있는 실용적인 백이 등장했다. 그의 손끝에서 발렌시아가의 DNA는 부드럽게 재구성됐다.
피치올리의 발렌시아가는 새로움을 과시하지 않는다. 그는 과거의 구조를 해체하는 대신, 그 속에 여백을 만든다. 몸과 옷 사이의 거리, 시선과 감정 사이의 공기를 디자인한다. 그가 만들고 싶은 건 ‘옷의 혁명’이 아니라 ‘감정의 회복’이다. 뎀나가 자극과 도발의 언어로 발렌시아가를 정의했다면, 피치올리는 침묵과 품격으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하지만 그것은 후퇴가 아니라 진화에 가깝다. 그는 균형과 감정을 통해 하우스의 중심을 다시 인간에게 돌렸다. 화려한 장식도, 충격적인 이미지도 없다.
사랑과 존중, 연대의 감정을 품은 옷. 차갑고 메말라 가는 시대에서 그의 컬렉션은 한줄기 빛처럼 마음을 비춘다. 발렌시아가가 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를 선택한 건 모두에게 놀라움이었다. 그러나 그의 컬렉션이 증명하듯 놀라움은 곧 설득으로 바뀌었다. 과시보다 온도, 기술보다 감정. 피치올리의 시대는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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