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시공간 속 자아상에 대한 질문은 강현선의 작업 세계를 관통해온 핵심 화두다. 작가는 사회의 획일적 시스템과 디지털 환경 속에서 변주되는 정체성을 탐구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신체를 스캔해 만든 인공지능(AI) 아바타 ‘루시(Lucy)’를 하나의 페르소나이자 독립된 주체로 발전시켜왔다. 작가는 202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아라온호 승선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해당 항해의 유일한 예술가로서 협력 기관인 극지연구소 및 미국 MBARI 연구소 과학자들과 함께 북극을 탐방했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실제적 탐험의 경험과 루시의 시선을 교차하며 ‘기호로 재단된 자연’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제시한다.
작가에게 ‘모험’은 과거 서구의 탐험 서사에서 비롯된 정복의 개념이 아닌 시야의 확장이며,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이다. 7년간 바다를 항해한 케이틀린 스미스의 “모험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대답에서 작가는 자신의 목적 지향적 관점을 되돌아보며 마침내 문명의 안락한 경계 밖인 북극으로 자신을 던졌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거대한 자연 앞에서 작가가 목도한 것은 인간이 구축한 정교한 문명 시스템이었다. 전시의 출발점은 작가가 마주한 북극의 이질감이다. 기후 위기와 그린워싱의 상징으로 소비되어온 북극의 이미지는 실재하는 자연이라기보다 미디어에 의해 끊임없이 가공된 ‘기호’의 중첩에 가까웠다. 이러한 비현실적 감각은 신작 회화에서 극도로 절제된 ‘매뉴얼’ 형식으로 시각화된다. 작가는 생존을 위한 해상 훈련과 화재 진압 과정을, 마치 비상 상황까지 질서 속에 가둔 비행기의 ‘안전 매뉴얼’처럼 건조한 화면으로 옮긴다. 재난의 혼돈마저 인간의 질서와 체계 안에 있는 듯 연출된 이 장면은 대자연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문명의 오만한 믿음을 투영한다.
북극의 비현실성은 영상 작업 ‘아라온 로그’를 통해 가상의 내러티브로 확장된다. 쇄빙선의 가상 선원 루시의 시선을 따라 전개되는 항해 기록은 빙하 생태계를 관측하는 동시에 소멸하는 대상을 디지털 데이터로 치환하는 과정을 담는다. 인류의 지식 체계 안으로 편입된 심해의 존재는 그 순간 고유한 생명력을 잃고 무색무취한 ‘정보’로 전락한다. 작품 속 내레이션은 이 탐험의 본질이 미지에 대한 순수한 경외심인지, 혹은 사라져가는 것을 소유하려는 문명적 강박인지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제기한다.
디지털 아바타 루시가 연산해낸 북극의 이미지는 이러한 실재와의 괴리를 극도로 밀어붙인다. 방대한 데이터의 통계적 조합으로 구축된 이 가상의 북극에는 공기의 서늘함도, 풍경의 고요함도 없이 오직 수치화된 평균값만 존재한다. 하지만 이 디지털 이미지는 실제 북극을 경험한 작가의 손을 거치며 다시 ‘회화’라는 물리적 실체를 획득한다. 캔버스 위에 쌓인 물감의 밀도와 붓질의 궤적은 삭제된 감각의 층위를 복원해내고, 이렇게 탄생한 회화는 이미지의 유통 방식에 의해 다시 무한한 네트워크의 정보로 흡수된다. 가상과 실재의 감각이 맞물리는 이 거대한 순환 속에서 작가는 우리가 딛고 선 현실이 얼마나 허약한 기표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환기한다.
결국 작가가 마주한 북극과 디지털 데이터, 그리고 이를 다시 캔버스로 옮긴 회화는 각기 다른 층위에서 우리가 ‘자연’이라 부르는 대상의 실체를 묻는다. 이 다층적 과정이 응축된 ‘제2의 자연(Second Nature)’은 문명이 재구성한 새로운 자연인 동시에, 가공된 기호를 실재보다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우리의 두 번째 본성을 함께 건드린다. 전시장에 펼쳐진 인공적 질서와 생경한 감각은 우리가 당연시해온 현실의 토대를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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