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불법행위로 대규모 피해가 발생해도 피해자들이 실질적인 구제를 받기 어려웠던 구조를 바꾸기 위한 법안이 국회에 제출됐다. 쿠팡 개인정보 유출 사태를 계기로 다시 불붙은 ‘집단소송법’ 제정안이다. 쿠팡뿐 아니라 롯데카드와 이동통신 3사(SK텔레콤·KT·LG유플러스) 등에서 잇따라 발생한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건은 수백만 명 단위 피해를 낳았지만, 개별 피해자가 소송을 제기하기에는 비용과 절차 부담이 커 실제 배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법조계에서는 “소액 다수 피해 구조에서 현행 개별소송 방식만으로는 기업의 책임을 충분히 묻기 어렵다”는 지적이 이어져 왔다.
4일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김현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기업의 불법행위로 발생한 집단피해에 대해 실질적인 손해배상을 가능하게 하는 '집단소송법 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이 법안은 온라인 플랫폼과 통신사에서 반복되는 개인정보 유출 사건, 자동차 배기가스 조작 등과 같은 대규모 피해 사건에서 피해자들이 집단으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현행 제도에서는 동일한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피해자 개개인이 별도로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 소송비용과 절차 부담 때문에 실제로는 다수의 소액 피해자가 권리구제를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결과 기업은 위법행위를 통해 얻은 이익을 사실상 보전하고, 피해자는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악순환이 이어져 왔다.
이번 법안은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50인 이상’에게 공통된 피해가 발생한 경우 대표당사자나 대표단체가 나서 집단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했다. 전문성이 요구되는 집단소송의 특성을 고려해 원고 측에는 변호사 강제주의를 적용하고, 법원이 소송을 허가하는 절차를 거치도록 설계됐다.
법안은 판결의 효력이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구성원에게도 미치도록 하는 ‘기판력 확장’ 제도를 도입했다. 집단소송 결과가 모든 피해자에게 일괄 적용되도록 해 개별 소송의 비효율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반대로 소송 결과의 적용을 원치 않는 피해자는 일정 기간 내 ‘제외신고’를 통해 집단소송에서 빠질 수 있도록 했다.
또 증거자료 확보가 어려운 피해자들의 현실을 감안해 법원이 피고 기업에 문서 제출을 명령할 수 있도록 하고, 기업이 정당한 이유 없이 이를 거부할 경우 피해자 주장을 진실로 추정할 수 있게 하는 특칙도 담겼다. 피해 규모 산정이 어려운 경우에는 통계적·평균적 방법으로 손해액을 산정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도 포함됐다.
법안은 집단소송 남용을 막기 위한 장치도 마련했다. 법원의 소송허가 요건을 엄격히 규정하고, 변호사 보수 조정 절차를 두는 한편, 분배절차 전반을 법원이 감독하도록 했다. 소송 과정에서 부정 청탁이나 배임 행위가 발생할 경우 강력한 형사처벌 규정도 함께 담았다.
김현정 의원은 “피해자가 많고 피해액이 작을수록 아무도 책임을 묻지 못하는 구조는 정의롭지 않다”며 “집단소송제 도입을 통해 기업의 불법행위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는 원칙을 확립하겠다”고 했다. 이어 “쿠팡 개인정보 유출 사태처럼 반복되는 대규모 피해 사건에서 국민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호할 제도적 기반을 만들겠다”고 했다.
이번 법안은 증권 분야에만 한정돼 있던 기존 집단소송 제도를 전 산업 분야로 확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법안이 통과될 경우 기업의 위법행위에 대한 억지력이 크게 강화되고, 개인정보 침해·소비자 피해 사건의 구제 방식에도 중대한 변화가 예상된다.
국회 논의 과정에서 기업 활동 위축 우려와 피해자 보호 필요성 사이의 치열한 공방이 예고되지만, 반복되는 대규모 소비자 피해를 막기 위한 제도 보완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는 점에는 이견이 적다. 집단소송법이 한국형 소비자 권익 보호 체계의 전환점이 될지 주목된다.
[뉴스로드] 최지훈 기자 jhchoi@newsro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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