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하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교체는 더 이상 놀라운 뉴스가 아니다. 그런 와중에 장 폴 고티에가 듀란 랜팅크를 헤드 디자이너로 임명했다는 소식은 전례 없는 인사 이동 물결에 파장을 만들었다.
장 폴 고티에가 2020년 봄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끝으로 50여 년의 여정을 마무리한 이후 하우스는 ‘로테이팅 게스트 디자이너’ 체제를 통해 쿠튀르 컬렉션을 이어왔다. 치토세 아베를 시작으로 글렌 마틴스, 올리비에 루스테잉, 하이더 아커만, 줄리앙 도세나, 시몬 로샤, 니콜라스 디 펠리체, 루도빅 드 생 세르냉이 차례로 아카이브를 재해석해 왔다.
쿠튀르는 여전히 하우스의 강력한 상징으로서 화제를 만들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지만, 그것만으로 브랜드를 지속하기에 한계가 있는 실험이었다. 그런 점에서 듀란 랜팅크의 임명은 로테이팅 시스템이 남긴 현 상황에 대한 구원투수 등판처럼 보인다. 장 폴 고티에가 그를 ‘악동’이라 부르며 하우스 수장으로 맞이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왜 듀란 랜팅크일까? “패션계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내가 가졌던 에너지와 대담함, 장난기를 발견했다.” 장 폴 고티에의 한 줄 소개처럼 혜성같이 등장한 그의 행보는 비범했다. 자넬 모네이의 ‘Pynk’ 뮤직비디오 속의 여성 생식기를 연상시키는 핑크 팬츠나 비욘세가 착용한 티파니 캠페인 룩은 듀란 랜팅크의 대담함과 위트를 충분히 보여주지만, 사실 그의 세계는 이보다 더 광활하다.
2021년 자신의 이름을 건 컬렉션에서 루이 비통, 프라다, 발렌시아가 등 럭셔리 하우스의 데드 스톡을 해체하고 봉합해 하나의 런웨이에 올린 이력은 단순히 ‘재활용’이라는 윤리적 수사를 넘어선 고요한 외침이었다. 이는 차세대 디자이너가 과거 세대의 생산물로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켜 패션 산업의 과도한 생산과 소비에 의문을 제기하는 신념 같은 것이었다.
이후 듀란 랜팅크는 2024년 LVMH 프라이즈에서 칼 라거펠트 특별상을 수상하며 자신이 ‘혁신적’이거나 ‘지속 가능한’ 디자이너라는 단순한 수식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러한 듀란 랜팅크의 행보는 장 폴 고티에 하우스의 역사와도 맞닿는다. 일찍이 장 폴 고티에는 일상의 오브제를 쿠튀르 재료로 끌어올리며 업사이클링이 ‘업사이클링’으로 명명되기 전부터 자원 순환의 미학을 탐구해 왔다. 낡고 이미 존재하던 것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은 듀란 랜팅크의 방식과 일맥상통한다.
듀란 랜팅크의 첫 장 폴 고티에 컬렉션이자 하우스의 레디 투 웨어 컬렉션의 부활이기도 했던 2026 S/S 컬렉션은 세컨드 스킨 셔츠, 콘 브라, 마리니에르 스트라이프 등 지난 수장의 상징적인 아카이브를 계승하는 동시에 신체를 드러내는 그만의 독특한 절개법과 과장된 실루엣, 나체를 그대로 프린트한 보디수트 등 그야말로 ‘도발적인’ 피스를 내세웠다. 그것도 매우 스포티하고 실용적인 형태로.
그렇다. 결과적으로 듀란 랜팅크는 하우스의 유산을 보존하되 현재의 미학과 사회적 감수성을 반영해야 하는 ‘장 폴 고티에 이후 시대’의 조건에 가장 완벽한 디자이너였을지도 모른다. 그 변화의 속도를 생각하면 장 폴 고티에가 본인의 ‘앙팡 테리블’이라는 별명을 직접 물려준 이유도 충분히 이해된다. 시대를 뒤흔들기 위해 필요한 건 여전히 약간의 무모함과 유머,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 존재하던 것들을 새롭게 사랑하려는 집요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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