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린 칼럼] 어느 건조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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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린 칼럼] 어느 건조 시간

문화매거진 2026-02-02 13:34:41 신고

▲ 그때의 그 캔버스 / 사진: 김세린 제공
▲ 그때의 그 캔버스 / 사진: 김세린 제공


[문화매거진=김세린 작가] 지금은 물감이 마르고 있다. 방금 막 10호짜리 캔버스의 바탕칠을 끝낸 참이다. 나는 지금 습기를 먹은 채 천장을 보고 있는 캔버스로부터 여덟 걸음 정도 떨어진 책상 앞 의자에 앉아 물감이 마르기를 기다리고 있다. 칠을 올린 게 몇 번째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너무 여러 번 칠해서 그런 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 기억이 나질 않는다.

방금 칠한 캔버스에 대해 말하자면, 언젠가의 나에게 바탕칠을 당한 채로 작업실 구석 어딘가에 박혀 있다가 마침 적당한 크기의 캔버스가 필요했던 오늘 나의 눈에 띄었다. 발견한 소감을 말하자면, 바탕의 마무리까지 얼마 남지 않은 이 캔버스가 반가웠다. 결국 노동의 총량은 같겠지만 과거의 노동에 대한 오늘의 발견이 수고로움을 덜었다는 기쁨으로 다가왔다. 

일주일 전에도 이 시간, 이 자리에서 바탕이 마르기를 똑같이 기다리고 있었다.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는 오늘과 달리 그날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물감이 마르기를 멍하니 기다렸다. 그게 화근이었을까.

일주일 전의 그 시간에는 굉장히 운 나쁘게도 하염없는 불안에 사로잡혀 버렸다. 앞으로 살면서 몇 번이나 이렇게 바탕칠을 하게 될까. 이렇게 열심히 칠한 바탕에 저번처럼 물감이 튀거나 기스가 나는 날은 얼마나 될까. 완성이 잘 될까. 마음에 들지 않는 완성을 얼마나 많이 마주해야 할까. 그렇게 허비되는 재료비는 얼마나 될까. 얼마나 더 그런 시간들을 넘겨 보내야 할까.

오래전 들었던 얘기가 떠오른다. 촉망받던 누군가가 입학과 동시에 혼자서 작업을 하겠다며 강단 있게 학교를 떠났다. 그런데 딱 1년 뒤, 불현듯 캠퍼스에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고 한다. 어째서 돌아왔을까- 하는 사소한 웅성거림이 있었을 테다.

반지하 작업실에서 혼자 젯소를 칠하고 마르기를 기다리며 담배를 태우던 시간. 그게 그렇게 공포스러웠다. 너희들은 그거 모르지?-라고 말했다고, 그렇게 전해 들었다. 기억과 전달상의 왜곡이 어느 정도 있겠지만 핵심은 같다. 아무도 모르는 시공간 속 혼자만의 열심과 반복. 주제넘게도 그가 겪었을 차가운 공기가, 그 공기의 멈춤이 실감 난다.

그런 생각들로 한 주를 보냈다. 그 외에도 나를 불안하게 할 거리들이 충분했으므로.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이어폰을 꽂지 않고도 멍하니 그런 생각들을 머릿속에 가득 채운 채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를 오갔다. 음악을 들을 수 없었다. 음악이 나의 생각을 방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했던 지난주가 지나고 이번 주는 다행히 발목 잡던 불안으로부터 잘 도망쳤다. 이런 불안은 지나고 보면 성가신 파리 같은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혹은 자주. 시야에 들어온 파리를 굳이, 굳이 돋보기로 들여다 보고선 공포에 휩싸인다. 제 발로 파리떼 속으로 들어간다.

불안은 내가 만든 영화다. ‘파리를 쫓아가다: 감독판’ 같은 것인데, 훌륭한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그저 의미 없이 달려드는 파리를 조악한 솜씨로 클로즈업 촬영해 아이맥스로 보고 난 후 어지럼증을 겪고, 몰려드는 역겨움에 헛구역질이 나는 셈이다. 

두려움과 막막함을 마주하는 일. 비단 작업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삶에 수없이 들이닥치는 상황일 것이다. 잘 넘어가자. 우리 모두 잘 피해 빠져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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