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가 EV3·EV4·EV5 고성능 GT 라인업 확대와 EV3·EV4·EV9 연식변경을 동시에 추진하면서 가격 전략에서도 전동화 시장의 다음 국면을 분명히 드러냈다. 이번 가격 정책의 핵심은 고성능 전기차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동시에, 트림·배터리·구동 방식별로 촘촘한 가격 사다리를 구축해 고객 선택권을 극대화한 데 있다. 단순히 "싸게 내놓는 전기차"가 아니라, 사용 목적과 예산에 따라 자연스럽게 상위 트림으로 이동하도록 설계된 구조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EV3와 EV4는 가격 구조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모델이다. 두 차종 모두 스탠다드와 롱레인지로 구분하고, 에어–어스–GT 라인으로 트림을 세분화했다. EV3의 경우 스탠다드 에어가 3,995만 원, 롱레인지 에어가 4,415만 원으로 약 420만 원의 차이를 두었고, EV4 역시 스탠다드 에어 4,042만 원에서 롱레인지 에어 4,462만 원으로 동일한 폭의 가격 간격을 설정했다. 이는 배터리 용량과 주행거리 차이를 가격에 일관되게 반영한 것으로, 소비자가 성능 대비 추가 비용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도록 한 구조다. 여기에 어스와 GT 라인으로 갈수록 수백만 원 단위의 단계적 인상이 이어지며, 사양 선택에 따른 가격 상승이 과도하지 않도록 조율됐다.
고성능 GT 모델의 가격 책정은 이번 전략의 또 다른 핵심이다. EV3 GT는 5,375만 원, EV4 GT는 5,517만 원, EV5 GT는 5,660만 원으로 책정돼 5천만 원대 초중반에 포진했다. 이는 기존 고성능 전기차가 6천만~7천만 원대 이상에 형성돼 있던 시장 구조를 감안할 때, 접근성을 크게 낮춘 가격대다. 특히 'GT 라인'이 아닌 듀얼 모터 기반의 정식 'GT' 모델임에도 이 가격대를 유지한 것은, 고성능 전기차를 소수 마니아의 영역에서 대중적인 선택지로 끌어내리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EV9 GT 역시 8,463만 원으로 책정되면서 보조금 수혜 대상에 새롭게 포함돼, 대형 전동화 SUV 고성능 모델의 실구매 부담을 낮췄다.
EV9의 연식변경 가격 전략은 시장 확대를 염두에 둔 조정으로 읽힌다. 신규 엔트리 트림 '라이트'를 도입해 스탠다드 기준 6,197만 원부터 시작하도록 하면서, 대형 전동화 SUV의 진입 장벽을 낮췄다. 동시에 롱레인지, GT 라인, GT까지 상단 트림을 유지해 고급·고성능 수요도 함께 흡수하는 구조다. 이는 EV9을 단순한 상징적 플래그십이 아니라, 실질적인 판매 볼륨을 확보하는 주력 전기차로 키우겠다는 가격 전략의 변화로 해석된다.
EV5는 가격 표기 방식에서 다소 복잡한 구조를 보이지만, 의도는 분명하다. 스탠다드 모델은 환경친화적 자동차 세제혜택 반영 전 가격을, 롱레인지와 GT는 세제혜택 반영 가격을 제시해 향후 혜택 적용 시 체감 가격 인하 여지를 남겼다. 이를 통해 EV5 스탠다드의 가격 경쟁력을 부각하는 동시에, 롱레인지·GT에서는 이미 현실적인 구매가를 제시해 선택을 유도하는 이중 전략을 취했다.
기아가 제시한 '실구매가 전망'은 이번 가격 정책의 방향성을 가장 잘 보여준다. 환경친화적 자동차 세제혜택 고시 완료와 정부·지자체 보조금, 전기차 전환지원금까지 반영할 경우 EV3·EV4는 3,200만 원대, EV5는 3,400만 원대, EV9은 5,800만 원대부터 구매가 가능할 것으로 제시됐다. 여기에 인증중고차 트레이드인 프로그램과 내연기관차 전환 고객 대상 추가 혜택을 더하면 체감 가격은 더 내려간다. 이는 고성능과 대형 전기차까지 포함한 전동화 라인업을 '현실적인 구매 선택지'로 재정의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종합하면 이번 가격 전략은 전기차 대중화 이후의 경쟁 국면을 겨냥한 설계다. 엔트리 모델로 진입 문턱을 낮추고, 배터리·구동 방식·성능에 따라 단계적으로 가격을 올리며, GT 모델로 전동화의 감성적 가치를 확장하는 구조다. 기아는 이번 가격 조정을 통해 전기차 시장에서 단순한 가격 경쟁이 아니라, "선택 구조의 경쟁"으로 한 단계 앞서 나가겠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폴리뉴스 정철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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