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라서 남자 이름을 빌렸고, 사랑했다는 이유로 스캔들이 됐던 천재 작가의 삶
남자가 되어야 작가가 될 수 있었던 시대
1819년 11월 22일, 영국 워릭셔의 평범한 농장에서 태어난 메리 앤 에번스(Mary Ann Evans, 1819~1880)는 자기 이름으로 글을 쓸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기 이름으로 쓰면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조지 엘리엇'(George Eliot)이라는 남자 이름을 골랐다.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재능으로 승부해야 할 문학계에서 성별이 먼저 검문소 노릇을 하다니. 이건 마치 오늘날 한국에서 이력서에 사진을 붙이고, 나이를 쓰고, 결혼여부를 밝혀야 하는 것과 비슷한 불합리다. "당신 실력 봅시다" 이전에 "당신 (부모가) 누구입니까"가 먼저인 세상. 조지 엘리엇은 그 검문소를 남자 이름이라는 위조통행증으로 뚫고 나갔다.
스캔들과 지성, 그 위험한 동거
메리 앤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어릴 때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지만 20대 초반에 종교를 버렸다. 1840년대 영국에서 이건 거의 "나 무신론자요"라고 광화문에서 외치는 것과 맞먹는 용기였다. 아버지 로버트 에번스(Robert Evans, 1773~1849)는 딸의 배교에 분노했지만, 그녀는 굽히지 않았다.
1851년, 런던으로 이주한 그녀는 지식인 모임에서 조지 헨리 루이스(George Henry Lewes, 1817~1878)를 만났다. 문제는 루이스가 유부남이었다는 것. 더 웃긴 건 루이스의 아내가 이미 루이스 친구의 아이들을 여럿 낳았다는 것. 그런데 루이스가 그 아이들 출생신고에 아버지로 서명했기 때문에, 당시 영국법상 이혼이 불가능했다.
1854년부터 메리 앤과 루이스는 공개적으로 동거를 시작했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남자들의 혼외정사는 눈감아주면서 여자가 당당하게 사랑을 선택하니 난리가 난 것이다. 메리 앤의 오빠 아이작(Isaac Evans, 1816~1890)은 여동생과 의절했다.
이게 2026년 한국에서 낯설게 들리는가? 여성 연예인이 결혼하면 "팬 배신"이라 난리고, 여성 정치인이 이혼하면 "사생활 관리 못한다"며 손가락질하는 나라에서. 조지 엘리엇의 1854년 스캔들과 2026년 한국의 여성 혐오 사이에 172년이 흘렀건만, 본질은 참 안 변했다.
40세에 시작한 소설가 인생
메리 앤이 '조지 엘리엇'이라는 필명으로 첫 소설을 쓴 건 1857년, 그녀가 거의 40세가 되어서였다. 늦깎이도 이런 늦깎이가 없다. 하지만 루이스의 격려 덕분에 용기를 냈다. 1859년 출간된 첫 소설 『아담 비드』는 대성공이었다.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1870)와 윌리엄 새커리(William Makepeace Thackeray, 1811~1863) 같은 거물 작가들이 극찬했다.
그 후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1860), 『사일러스 마너』(1861), 『미들마치』(1871~1872), 『다니엘 데론다』(1876)가 쏟아졌다. 특히 『미들마치』는 영문학사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1941)는 "어른을 위한 소설"이라 극찬했다.
조지 엘리엇의 진짜 무기는 지성이었다. 그녀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 1804~1872)의 『기독교의 본질』을 독일어에서 영어로 최초 번역했고(1854년), 바루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의 『윤리학』도 번역했다(1856년). 스피노자 철학은 그녀 소설의 뼈대가 됐다. 자유의지와 결정론, 감정의 작동원리. 이 모든 철학적 질문이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살아 숨 쉬었다.
마지막 사랑, 그리고 갑작스러운 죽음
1878년 11월 30일, 루이스가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24년을 함께한 동반자였다. 그런 그녀를 위로한 사람은 오랜 친구 존 월터 크로스(John Walter Cross, 1840~1924)였다.
놀랍게도 1880년 5월 6일, 루이스가 죽은 지 18개월 만에 메리 앤은 크로스와 결혼했다. 신랑은 그녀보다 20세나 젊었다. 60세 신부와 40세 신랑. 또 한 번 세상이 떠들썩했다. 하지만 이번엔 좋은 소식도 있었다. 그동안 의절했던 오빠 아이작이 축하 편지를 보낸 것이다. "드디어 제대로 된 결혼을 했구나." 형식적 결혼증명서가 24년 동반자 관계보다 중요했던 가부장의 논리.
신혼여행지 베니스에서 크로스는 호텔 발코니에서 대운하로 뛰어내렸다. 자살 기도였다. 곤돌라 선원들이 구조했고, 부부는 급히 영국으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결혼 7개월 뒤인 1880년 12월 22일, 메리 앤 크로스는 목 감염과 신장병으로 갑자기 숨졌다. 61세였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안장은 거부당했다. "기독교적 결혼 관행에 대한 악명 높은 적대감" 때문이었다. 대신 그녀는 하이게이트 묘지에 묻혔다. 루이스 무덤 옆에.
2026년 한국,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조지 엘리엇의 삶을 보며 한국 사회는 뭘 배워야 할까?
첫째, 재능은 성별 따위로 검열당해선 안 된다는 것. 2026년 한국에도 여전히 "여자 감독", "여성 작가", "여류 화가"라는 표현이 넘친다. 남자에겐 붙지 않는 접두어. 조지 엘리엇은 남자 이름으로 써야 제대로 읽혔다. 우리는 아직도 그 시대를 못 벗어났다.
둘째, 사랑의 형태를 타인이 재단할 권리는 없다는 것. 법적 혼인신고가 안 되어도 24년을 함께한 루이스와의 관계는 진짜 사랑이었다. 한국사회는 아직도 "정상가족"이라는 틀에 집착한다. 비혼, 동거, 재혼, 한부모 가정을 비정상으로 취급한다.
셋째,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 조지 엘리엇은 40세에 소설을 시작했고, 60세에 20세 연하와 결혼했다. 한국에선 35세가 넘으면 "노산", 40세가 넘으면 "경력단절", 50세가 넘으면 "은퇴 준비". 이 나이 차별적 시선을 깨야 한다.
넷째, 지식인의 역할이다. 조지 엘리엇은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쓴 게 아니라 철학적 질문을 던졌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도덕이란 무엇인가? 한국의 작가, 언론인, 학자들도 이런 근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당파 논리와 조회수에 매몰되지 말고.
다섯째, 여성의 연대다. 조지 엘리엇은 미국 작가 해리엇 비처 스토(Harriet Beecher Stowe, 1811~1896)와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여성 지식인의 삶을 논의했다. 2026년 한국 여성들도 이런 연대가 절실하다.
보이지 않는 합창단에 합류하기
조지 엘리엇은 시에서 이렇게 썼다. 죽어서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살아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천국이라고.
조지 엘리엇은 1880년에 죽었지만 아직도 살아 있다. 그녀의 소설은 여전히 읽히고, 그녀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여자라서, 나이가 많아서, 스캔들이 있어서 주저앉지 않았던 그 용기. 지성으로 세상과 맞서고, 사랑으로 편견을 뚫었던 그 고집.
2026년 한국도 여전히 성차별, 나이차별, 혐오가 넘친다. 여성은 여전히 남자이름을 빌려야 할 때가 있다. 익명 게시판에서, 온라인 게임에서, 때로는 직장에서도. 이 얼마나 조지 엘리엇의 1857년과 닮았는가.
하지만 포기하지 말자. 조지 엘리엇은 40세에 시작해서 세계 최고의 소설가가 됐다. 루이스와 24년을 함께하며 행복했다. 자기 이름 대신 남자이름을 썼지만, 결국 역사는 그 이름 뒤의 진짜 여자를 기억한다.
메리 앤 에번스. 조지 엘리엇. 그녀는 보이지 않는 합창단에 합류했다. 그리고 아직도 노래한다. 우리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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