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재한 항공·방산 전문기자] 폴란드·중동·동남아를 대상으로 한 대형 수출 계약이 이어지면서 K방산 주요 업체들의 수주잔고가 100조원 안팎까지 불어났다.
29일 방산업계에 따르면 국내 주요 방산업체들이 확보한 수주잔고를 합산한 규모는 이미 향후 4~5년치 일감을 확보한 수준에 이른다. 수출 실적만 놓고 보면 한국의 방위산업이 한 단계 도약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수주잔고 100조원이 곧바로 안정적인 납품과 수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계약서에 쌓인 물량을 실제로 생산하고 제때 인도하려면, 동시에 가동할 수 있는 생산 설비와 즉시 투입 가능한 숙련된 인력, 안정적인 부품·소재 공급망이 함께 갖춰져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뒤처질 경우, 수주 호황은 부담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지적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제기되고 있다.
◇ 잘 팔리는 것과 제때 만드는 것은 다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수주잔고가 급증한 배경으로는 빠른 납기와 우수한 성능, 전차·자주포·다연장로켓·항공기 등을 묶은 대형 패키지 계약 등이 함께 꼽힌다. 이 가운데서도 빠른 납기가 수주 확대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국내 방산업체들은 경쟁국 대비 짧은 납기를 강점으로 패키지 공급을 제안하며 단기간에 대규모 계약을 성사시켰고, 그 결과 수주 물량이 한꺼번에 쌓이면서 수주잔고 규모도 빠르게 불어났다는 분석이다.
문제는 수주 속도와 생산 속도가 항상 같지 않다는 점이다. 계약 체결은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이뤄질 수 있지만, 생산 설비 증설과 인력 확보, 협력업체 공급망 정비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수주잔고가 늘어날수록 공장 가동률과 인력 운영 부담도 함께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은 해외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의 트렌드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 전역에서 방위력 강화를 위한 무기체계 도입이 급속히 확대되면서 전차·장갑차 등의 방호력을 좌우하는 핵심 부품인 고강도 방어강판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수요 증가에 비해 생산 역량이 제한되고 있어 유럽 전반에서 공급 부족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보고서는 특히 핵심 방산 소재의 경우 공급할 수 있는 기업이 제한적이고 군사용 인증 절차도 길어, 수요가 갑자기 늘어나면 생산 일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는 방산 수요가 단기간에 확대될 경우, 생산 설비와 부품·소재 공급 여건에 따라 납기 지연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는 의미다.
대형 방산 계약일수록 이러한 부담은 더 커진다. 일부 계약에는 현지 생산이나 조립 조건이 포함돼 있고, 초기 물량은 짧은 기간 안에 인도해야 하는 일정이 제시되는 경우도 많다. 이는 국내 생산라인 가동과 동시에 해외 현지 공장 구축, 인력 양성, 부품 공급망 관리까지 병행해야 함을 의미한다.
◇ 수주 100조, 성과이자 시험대
방산 전문가들은 방산 수요와 수주가 급증할수록 생산 기반과 공급망이 이를 따라가지 못해 생산 병목과 납기 지연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여러 생산 거점을 동시에 운영할 경우, 인력 숙련도 유지와 품질 관리 부담도 함께 커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유형곤 한국국방기술학회 센터장도 “국내에서 생산해 납품하는 경우, 일정 조정 등에서 어느 정도 유연성이 있을 수 있지만, 해외 현지 생산 조건이 붙은 계약은 상황이 다르다”며 “해외에서 생산시설과 공급망을 새로 구축하고, 현지 인력을 교육해 원하는 품질을 확보하는 경험이 많지 않다는 점은 부담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전문가들은 ‘수주잔고 100조원 시대’를 단순한 호황이 아니라 생산 설비·숙련 인력·부품 공급망이 실제 물량을 감당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국면으로 보고 있다. 수주 규모가 커질수록 실제 경쟁력은 계약을 따내는 능력이 아니라, 계약 이후 단계에서 이를 안정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 생산과 납기 이행 여부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방산 수출 확대가 지속 가능한 성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생산 인프라 확충과 공급망 안정화가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결국 수주잔고 100조원 시대가 성과로 기록될지, 부담으로 남을지는 이제 계약 이후 단계에서 판가름 날 전망이다. 빠른 수주 경쟁이 아니라 실제 납품을 얼마나 차질 없이 이행하느냐가 향후 K방산의 지속가능성을 가늠하는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Copyright ⓒ 이뉴스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