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조선의 여인, 그 이름 운낭자. 화폭 속 그녀의 시선과 손끝에는 시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채용신이 그린 '운낭자 초상'은 미의 기준을 넘어 여성의 모성과 역사적 용기를 함께 담아내며, 한 장의 그림이 어떻게 개인의 삶과 사회적 기억을 담아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채용신 필 '운낭자 초상'은 18~19세기 조선 기녀 문화와 여인들의 사회적 위치를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이다. 입상 형식으로 표현된 운낭자는 짧은 저고리와 풍성한 치마를 입고 있으며, 치마 사이로 드러나는 반달 모양의 흰버선은 당시 미인도에서 흔히 나타나는 양식적 특징과 세련된 디테일을 보여준다.
운낭자는 본명 최연홍으로 평안남도 가산고을의 청기였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남편과 시부모가 희생되는 극한 상황에서도 장례를 치르고 시동생을 회복시킨 기록은, 그림 속 인물이 미적 대상이 아니라 역사적 행위자로서 평가받을 이유를 분명히 한다. 그림 우측 제기에 기록된 27세의 모습은 그녀가 이미 성숙한 여성으로서 모성과 책임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채용신은 평강 본관으로, 호는 석지이며 종2품 벼슬에 오른 화가였다. 그는 전주로 낙향한 후 다양한 초상화를 남겼으며, 특히 조선 후기 여성과 우국지사의 초상화에서 탁월한 솜씨를 보였다. 그의 작품은 인물의 외형뿐 아니라 내면과 사회적 지위를 포착하는 데 뛰어난 정교함을 갖는다.
그림 속 운낭자의 단정한 쪽머리와 머리에 꽂힌 잠, 풍성한 치마 주름, 젖가슴과 발끝까지 세밀하게 묘사된 표현은 채용신의 회화적 숙련도를 잘 보여준다. 특히 팔에 안긴 아기는 그림에 모성적 무게와 정서를 더하며, 개인적 삶과 공적 행위가 결합된 인물임을 부각한다.
제기 속 ‘갑인월석지사’ 기록을 통해 제작 시기는 1914년으로 확인된다. 이는 홍경래 난 이후 백여 년이 지난 시점이지만, 운낭자의 삶과 업적이 문화적 기억 속에서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음을 보여준다. 계월향 사당 의열사에 봉안된 기록은 초상이 단순한 예술품을 넘어 공적 기념으로 기능했음을 시사한다.
당대 미인도와 비교할 때 '운낭자 초상'은 공적 의미와 미적 감각이 결합된 희귀한 사례다. 부산 동아대학교 소장 '미인도'나 채용신의 '팔도미인도병'과 부분적으로 유사한 양식을 보여주면서도, 아기를 안은 모성적 이미지와 역사적 인물로서의 위상을 동시에 담아냈다. 이러한 구성은 조선 후기 여성 초상화에서 드물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그림 속 운낭자의 모습은 외형적 아름다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저고리와 치마를 통한 전통 의복 표현, 쪽머리와 잠, 아기를 안은 팔의 손동작까지 모든 요소가 모성과 책임감을 강조한다. 채용신은 인물의 육체적 존재감을 살리는 동시에, 인간적 서사와 정서를 화면에 녹여냈다.
운낭자는 국가로부터 표창을 받으며 기적(妓籍)에서 제외되었다. 이는 그녀의 행적이 개인적 미담을 넘어 공적 가치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며, 초상이 사당에 봉안된 사실은 당시 사회에서 여성이 수행한 역할과 그 존중을 엿보게 한다.
채용신의 화풍은 사실적이면서도 정서적 울림을 지닌다. 치밀하게 빚어진 쪽머리와 잠, 저고리 아래의 섬세한 주름, 치마 사이로 드러난 발끝까지, 모든 요소가 화면 전체와 조화를 이루며 인물의 내면과 삶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운낭자 초상'은 회화적 기교와 역사적 서사가 결합된 작품으로, 조선 후기 여성의 용기와 모성, 사회적 공헌을 한눈에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그림은 시대를 넘어 현대 관객에게도 강한 울림을 준다. 개인의 삶과 역사적 사건이 예술 속에서 만날 때, 한 장의 초상화가 사회적 기억과 문화적 의미를 어떻게 담아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운낭자 초상'은 미적 아름다움과 역사적 서사를 동시에 갖춘 작품으로, 조선 회화의 다층적 의미를 이해하게 하는 창이 된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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