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썰 / 임나래 기자] 은행권에서 근무시간 단축 논의가 본격화된 지 석달이 지났지만, 현장은 여전히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금융노조와 사용자협회가 금요일 1시간 단축근무와 주 4.5일제 도입을 위한 태스크포스(TF) 구성 합의에도, 실제 제도 도입은 은행별 여건과 현장 수용성, 업무·평가체계 개편 과제를 넘지 못한 채 ‘공회전’ 상태다. 일부 은행이 시범 운영에 나섰지만, 업무량 조정 없이 근무시간만 줄이는 방식에 대한 회의론이 확산되면서 금융권 전반은 속도 조절 국면에 들어섰다.
◇4.9일제 합의 이후 3개월…현장은 여전히 공회전
지난해 10월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금융노조)과 금융산업사용자협회는 ▲금요일 1시간 단축근무 ▲주 4.5일제 도입을 위한 TF 구성에 잠정 합의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났지만 금요일 1시간 단축근무, 이른바 ‘4.9일제’를 정식 도입한 금융사는 없다. 은행별 영업 구조와 지부별 여건이 서로 다른 데다, 노사 간 세부 운영 방식에 대한 추가 협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만 근무시간 단축을 둘러싼 움직임은 있었다. IBK기업은행은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근무시간 1시간을 비대면 연수로 대체하는 ‘엣지연수’ 제도를 운영 중이며, NH농협은행도 상반기 내 단축근무 도입을 예고했다. 신한·하나은행 역시 내부 협의 중이며, 우리은행도 오는 23일 노조위원장 취임 이후 논의할 전망이다.
이런 가운데 금융권 최초로 주 4.9일제 도입을 추진했던 KB국민은행에서 제동이 걸렸다. KB국민은행 노조는 지난 18일 4.9일제 도입을 포함한 임금·단체협약(임단협)에 잠정 합의했지만, 20일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부결됐다. 이에 따라 은행권 첫 4.9일제 도입은 연기될 가능성이 커졌고, 은행권 일괄 도입 역시 불투명해졌다.
◇지점별 체감 엇갈려…“일은 그대로, 시간만 줄었다”
내부에서 단축근무를 둘러싼 시각 차이 역시 걸림돌이다. 인터넷은행과 시중은행 간 온도차도 뚜렷하다. 비대면 중심의 인터넷은행은 단축근무나 주 4.5일제 도입을 둘러싼 논의조차 없다.
반면, 전국 단위 영업점을 운영하는 시중은행은 내부에서도 부서와 영업점별 체감 차이가 크다. 본부 부서는 상대적으로 업무 시간 조정이 가능한 반면, 영업점은 마감 업무와 고객 대응, 내부 보고가 특정 시간대에 집중돼 근무시간 단축 효과가 낮다. 업무 성격에 따라 체감이 크게 갈리는 셈이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조기 퇴근을 하더라도 업무량이 줄지 않으면 효과는 크지 않다”며 “특히 영업점은 마감 업무와 고객 대응이 몰리는 구조라 근무시간만 줄이는 방식으로는 실질적인 변화가 어렵다”고 말했다.
반면, 금융권 다른 관계자는 “선택형 제도를 통해 조기 퇴근을 경험한 직원들 사이에서는 실제로 개인 일정 조정이 수월해졌고 만족도도 비교적 높게 나타난다”며 “선택 사항으로 운영되는 만큼 업무 밀도가 과도하게 높아지는 부작용은 크지 않다는 평가도 있다”고 전했다.
◇‘4.5일제’로 가는 길…업무·평가체계 손질해야
근무시간 단축은 업무 배분과 조직 운영 방식 전반과 맞물려 있다. 은행권에서는 ‘제도가 현장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업무량 조정과 프로세스 개선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여전히 핵심성과지표(KPI)와 같은 실적·매출·상담 건수 중심의 평가 체계가 유지되는 한, ‘허울뿐인 복지’로 전락할 수 있다.
현장 수용성에 대한 우려로 은행권은 제도 확산에 앞서 속도 조절에 나섰다. 금융권 또 다른 관계자는 “지금은 어느 한 곳이 앞서 나가기보다는 서로 눈치를 보며 수위를 조절하는 국면”이라며 “일괄 도입보다는 선택형·시범 운영을 통해 리스크를 관리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4.9일제는 이미 방향이 정해진 수순에 가깝다”며 “지금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이후 4.5일제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는 업무 구조와 평가 방식 설계”라고 말했다. 근무시간 단축 논의는 이제 ‘시행 여부’를 넘어, 은행권 근무 문화 전반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가늠하는 시험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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