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미 준부터 유이화까지 바람의 건축에 담긴 호흡이 이어진다.
한남동의 페즈(FEZH)는 사람이 머물고 관계가 발생하는 건물을 목적으로 설계되었다. 빠른 이동과 효율을 요구하는 도심 한가운데서, 이 건물은 일부러 속도를 늦춘다. 계단은 곧장 목적지로 안내하지 않고, 동선은 때때로 헤매게 하며, 벽돌과 벽돌 사이로 스며드는 빛과 바람은 사용자의 몸이 먼저 반응하게 만든다. 건물의 빈틈에서 사람들은 계절을 느끼고, 시간의 흐름을 느끼며 풍경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일상의 틈을 목격한다. 이곳을 설계한 건축가 유이화는 페즈를 하나의 ‘결과물’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며 사람과 함께 살아 움직이는 장소로 상정했다. 주말이면 버스킹이 열리고, 반려견과 산책하던 이들이 자연스럽게 들어와 앉는다. 계획된 기능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행태와 관계의 풍경이다.
지금 페즈에서는 유이화와 이타미 준의 전시가 열린다. 전시 제목은 <바람의 건축: 이타미 준과 유이화의 바람이 남긴 호흡>. ‘바람의 건축가’로 불린 이타미 준의 철학과, 그로부터 이어진 호흡이 유이화의 건축으로 어떻게 전이되고 변주되는지를 따라가는 전시다. 여기서 바람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다. 도심 속의 여유, 몸에 넣는 공기, 몰입에서 벗어나기 위한 환기이자, 관계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 매개다.
전시는 유이화의 최근 작업에서 출발해, 그녀가 합류했던 시점의 프로젝트들, 그리고 이타미 준의 대표작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순 구조로 구성된다. 계단 사이사이에 적힌 문장에는 두 건축가의 언어가 구분 없이 섞여 있다. 누구의 말인지 명시하지 않은 이유는 분명하다. 이 전시는 영향과 계보를 증명하기보다, 대화처럼 이어지는 사유의 흐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묵직한 매스와 강한 선언이 특징인 이타미 준의 건축과, 유연한 선과 사용자 행태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는 유이화의 건축은 다르지만, 둘은 같은 질문을 공유한다. ‘이 시대에 건축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페즈라는 건물 자체가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다. 커뮤니티를 전제로 한 건축은, 고이지 않고 흐르는 바람처럼 사람들을 머물게 하고, 스치게 하고, 다시 돌아오게 만든다. 전시는 그 안에서 묻는다.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는 어떤 호흡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소리를, 어떤 공간을 통해 남길 것인가. 전시는 1월 18일까지 이어진다.
유이화가 건축한 페즈(FEZH) 한남.
<바람의 건축: 이타미 준과 유이화의 바람이 남긴 호흡>이라는 전시 제목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바람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굉장히 메타포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실제 바람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죠. 아버지, 이타미 준이 ‘바람의 건축가’라고 불린 이유는 사실 관계성에 대한 고민을 건축으로 구현했기 때문입니다. 자연과의 관계, 장소와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매개체로서의 건축을 늘 이야기하셨죠. 이번 전시는 유이화에서 이타미 준으로 이어지는 구조입니다. 그 철학이 하나의 ‘호흡’처럼 이어진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저에게 전달된 그 바람, 그 호흡이라는 의미로 <바람이 남긴 호흡>이라는 제목을 정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전해진 호흡이 지금 유이화의 건축에 어떤 방식으로 반영되고 있나요?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건축을 대하는 태도 혹은 임하는 자세일 수도 있고, 대지를 다루는 관점이나 시각 같은 부분도 전해졌죠. 그 코어는 아버지에게서 영향을 받았지만, 저는 또 저대로 호흡을 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과의 호흡, 시대성과의 호흡 같은 것들. 그래서 저만의 과정을 또 밟고 있는 거죠.
전시 큐레이션을 할 때 특히 중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요? 우선 대표작 위주로 구성했습니다. 관람객이 페즈에 입장하면 유이화의 작품부터 보게 되니까, 유이화의 대표작에서 시작해 이타미 준의 데뷔작으로 가는 역순 구조로 기획했어요. 첫 번째 테마는 페즈를 비롯한 저의 최근 대표작 네 점, 두 번째 테마는 제가 합류한 시점부터 아버지가 타계하신 시점까지 진행한 한국 프로젝트, 세 번째 테마는 아버지 이타미 준의 철학적 근간을 보여주는 대표작들로 구성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전시실에 들어가는 입구 바닥에 쓰인 ‘Be Gentle with the Earth’를 지나는 순간부터 전시가 시작되는 기분이었습니다. 대지를 대하는 마음이 담긴 건축의 시작점이랄까요. 그럴 수도 있죠. 건축주가 중시한 지점이기도 하고, 이 건축에 담긴 저의 철학이기도 하니까요.
전시에서는 이타미 준의 회화와 가구도 만나볼 수 있다.
한남동이라는 지역은 도심의 한복판입니다. 자연과는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먼 곳이죠. 하지만 페즈 건물에는 포켓가든을 조성해 도심 속 작은 쉼터를 만들었고, 벽돌로 지은 외벽에는 바람이 드나들고 바깥 풍경이 보이도록 틈을 만든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자연을 구성하는 요소에는 꼭 풍경만 있는 건 아닙니다. 빛, 바람, 그리고 시간성.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시간에 따라 햇빛과 그림자가 계속 바뀌는데, 그런 흐름을 담고 싶었어요. 도시의 흐름은 굉장히 빠릅니다. 하지만 이 공간만큼은 조금 천천히 흘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목적지로 빠르게 이동하기보다 그 안에서 조금 헤매게 일부러 미로 같은 구조로 만들었어요. 우연히 발견하는 공간을 계속 만나게 하기 위해서죠. 물론 정말 급한 사람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하면 되지만, 저는 이 공간을 하나의 ‘여행의 시작’으로 보고 싶었어요. 페즈라는 이름도 모로코의 천년 고도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페즈(Fes)에서 따온 거고요. 거기에 한남동의 H를 붙여서 ‘페즈(Fezh) 한남’이 된 거죠.
건축가의 의도대로 계단을 오르면 난데없이 전시장 입구가 나오고, 위층 전시장으로 가기 위해 한가운데 계단을 오르는 동선이 인상적이었어요. 의도된 헤맴이에요. 탐험하듯이 공간을 발견하게 되죠. 반 외부 계단을 통해 완전히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느낌, 물 위를 건너 명상 공간으로 들어가는 구조도 의도한 장치고요.
이 건축물에서 ‘바람’은 어디에서 가장 잘 느낄 수 있을까요? 바람은 저에게 여유이기도 해요. ‘바람 쐬러 가자’, ‘콧바람 좀 쐬자’라는 말처럼요. 아버지도늘 ‘몸에 바람을 넣어라’라고 하셨어요. 너무 몰입하면 창의적인 생각이 나오지 않으니까, 산책을 하든, 잠깐 떠나든, 몸에 바람을 넣어야 한다고요. 그래서 바람은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재정비하고, 나를 돌아보는 의미라고 생각해요.
전시장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길, 유이화의 건축을 보고 이타미 준과 유이화가 함께 작업한 건축을 지나 이타미 준의 시작점으로 가는 계단에는 여러 문장이 적혀 있습니다. 아버지의 글과 유이화의 말이 섞여 있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일부러 섞어놨어요. 누구의 말인지 구분하지 않고, 마치 저와 아버지가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싶었어요.
1 자신의 건축 모형 앞에 선 유이화. 2 이타미 준이 사랑한 달항아리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전시가 이어진다. 3 건축 설계 메모로 가득한 공간.
여러 문장 중 어떤 말을 선택하셨나요? 계단에 들어갈 문장은 제3자에게 맡겼어요. 내부 팀원에게 뽑아보라고 했죠. 제게 익숙한 문장은 오히려 제 안에 매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 새롭게 와닿는 문장을 담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뽑아놓고 보니 아버지의 문장과 제 문장이 표현은 다르지만 통하는 결이 있다는 걸 새삼 느꼈어요.
전시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남는 부분이 있다면요? 연대기를 벽에 전시했을 때요. 제가 합류한 시점,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 그리고 지금 제가 가는 길이 하나의 흐름으로 보이니까 굉장히 뭉클했어요. 직원에게도 입사 시점별로 서보라고 했어요(웃음). 그때 다들 뭉클함을 느끼더라고요.
그 연대기의 시간 안에는 건축가로서 큰 고민 앞에 놓였을 때도 있을 텐데요. 그럴 때마다 어떻게 해법을 찾으며 지금까지 왔나요? 혼자 책상에 앉아서 고민한다고 답이 찾아지진 않습니다. 오히려 팀원들과 밖으로 나가 공간을 바꿔요. 감성을 충족시켜주는 환경, 잘 디자인된 공간 혹은 자연 안에 머물다 보면 창의성이 살아나는 걸 느껴요.
말씀하신 것처럼 연대기에는 아버지와 함께 작업한 시간도 담겨 있습니다. 유이화의 건축에는 이타미 준의 영향도 있을 테지만 유이화만의 철학도 녹아 있을 테죠. 살아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어요. 아버지는 일본에서 많이 활동하시며 동양 철학의 영향을 받으셨고, 저는 뉴욕에서 공부하고 한국에서 일했으니까요. 아버지가 늘 하신 말씀이 있어요. ‘디자이너는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고, 누구를 만나고, 어떤 책을 읽느냐가 모두 디자인으로 나온다.’ 디자인은 결국 신체에서 나오는 행위니까요. 아버지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아왔어요. 전시장 입구에는 ‘이타미 준과 유이화 건축의 비슷함과 다름에 대한 한 평론가의 글이 있는데, 저도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부분이 다가오더군요. ‘이타미 준의 건축은 매스 위주의 묵직함이 보이고, 유이화의 건축은 유연한 선이 보인다.’ 제게는 매우 재밌는 지점이에요. 의도하지 않아도 사람마다 취향이 있고 습관이 있잖아요. 디자인에서도 그 습관이 나와요. 새삼 제 건축의 특징이 와닿았죠.
요즘 새롭게 깨닫는, 아버지 이타미 준과 다른 점 같은 게 있나요? 잘 모르겠어요. 다만 아버지는 천생 예술가셨고, 그에 반해 저는 아버지보다는 사용자의 행태, 동선 같은 부분에 더 흥미가 있어요. 개인적인 관심사이기도 하고, 결국 기능을 해야 지속 가능하기 때문에 기능적인 부분에 더 신경 쓰게 돼요. 때론 그로부터 시작할 때도 있고요. 그리고 저는 주거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문득 페즈라는 건축의 시작점이 궁금합니다.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공간을 빠르게 찾아내는 효율성 위주의 공간이 아니라 잠시 헤매다 의외의 발견을 할 수 있도록 사용자를 이끌어내는 건 건축주의 철학과도 맞아떨어져야 가능하고요. 기획 과정에서 건축주를 처음 만났을 때 ‘여기에 몇 평 건물을 지을 수 있나요?’가 아니라 ‘한남동의 커뮤니티 센터를 만들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에 굉장히 감동받았고, 도심 속 광장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해석하게 되었어요. 좁은 골목을 지나 갑자기 비어 있는, 이 스케일에 어울리지 않는 보이드(Void)를 제안했을 때도 그 의도를 존중해주셨어요. 그렇게 완성된 후에 주말마다 사람들이 모이고, 다양한 버스킹이 열리고, 반려견을 데리고 편하게 드나드는 모습을 봤을 때 정말 희열을 느꼈습니다. 상상했던 장면이 실제로 펼쳐지고 있었거든요.
1 페즈(FEZH) 한남에 들어선 순간 전시가 시작된다. 2,3 방주교회부터 시호재까지, 이타미 준과 유이화의 대표 건축물에는 깊은 공명이 있다.
커뮤니티 건축물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공기가 움직여 바람을 만들고, 바람이 호흡으로 전해지듯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건축이 도시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요. 그럼요. 건축물 자체가 정적인 결과물이 아니잖아요. 특히 도시 속 건축은 지속 가능하게 살아 움직이는, 동적인 자산이자 공간이자 장치일 수 있다고 봅니다. 시간이 흐르면 노후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 시대성에 맞게 리뉴얼되거나 재생 차원에서 목적에 맞게 다시 디벨롭되면서 진화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도시의 흐름, 도시의 시간성은 굉장히 흥미롭죠. 그래서 도시 재생은 신중해야 해요. 그냥 밀어버리고 새로 만드는 건 도시의 생명력을 없애는 거라고 보거든요. 우리나라처럼 근현대 건축의 주기가 짧은 나라가 없어요. 부동산 가치로만 보는 접근은 이제 달리 해석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건축가로서 ‘나의 생각’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건 뭘까요? 자연일 수도 있고, 자연 속의 나일 수도 있어요. 내가 어디서 가장 힐링되고, 가장 안정감을 느끼고, 가장 행복했나를 생각해보면 항상 자연 속에 있는 제 모습이에요. 내가 언제 가장 아름다움을 느꼈는지, 그때의 햇살과 공기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 아름다운 순간을 어떻게 이 공간으로 가져오는지, 그로부터 제 건축이 시작됩니다.
하나의 건축을 완성하기까지 가장 애정이 가는 지점은 어디인가요? 그 공간에서 사람들이 충분히 즐기는 모습을 봤을 때가 가장 소중합니다. 가령 유동룡미술관에는 ‘먹의 공간’이라 불리는 라이브러리가 있어요. ‘전시에서 영감을 받고 라이브러리에서 사유’하기 위한 공간인데, 말하자면 ‘멍하니 머무는’ 공간이죠. 누구도 이곳에서 멍하니 있으라고 하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라이브러리에서 멍하니 내면을 충전해요. 그런 모습을 상상하며 만든 공간이 상상한 대로 실행될 때 행복해요. 건축가로서 보람도 있고요.
처음 건축 일을 시작했을 때와 지금, 건축가로서 달라진 면이 있나요? 예전에는 작가성, 멋있는 건물 만드는 건축가에 대한 욕심이 컸어요. 유명해지고 싶고, 상도 많이 받고 싶고. 근데 그런 욕심이 다 없어졌어요. 욕심이 없어지니까 아이러니하게 상도 받고, 사람들이 그 공간에서 편하게 머무른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요. 무언가를 통달하기에는 아직 젊은 건축가이지만 그래도 작가성에 대한 집착 같은 건 많이 없어졌어요. 아마 그 점이 가장 달라진 것 같아요.
이 전시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이 공간과 전시를 어떤 식으로 즐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나요? 유동룡미술관의 슬로건이 ‘Find your originality’입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꼭 건축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만의 소리를 내기 위한 부분들이 있어요. 건축가 이타미 준과 유이화가 자기 자리에서 자기만의 소리를 내면서 시대성을 생각하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면, 관람객도 각자의 자리, 각자의 직업에서 ‘나는 어떤 나만의 소리를 낼 것인가’를 사유하는 전시가 됐으면 좋겠어요.
더네이버, 피플, 인터뷰
Copyright ⓒ 더 네이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