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김아야 작가] 나의 작업에는 온전한 얼굴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작은 인물의 몸, 혹은 몸의 일부가 확대되어 나타난다. 웅크린 자세, 등을 보인 채 돌아선 몸, 고개를 숙인 상태의 인물들이 작품 속 어딘가에 머물지만, 끝내 얼굴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이 선택은 처음부터 분명한 계획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인물 작업을 시작했을 때 막연하게 얼굴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감각이 먼저 있었다.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한 거부감이 존재했다. 작업의 수가 쌓이면서 이 거부감은 점차 반복되는 선택이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작업의 특징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선택을 ‘보편성’이라는 말로 설명하곤 했다. 특정한 인물의 이야기로 고정되지 않기 위해서, 누구의 몸으로도 읽힐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이었다. 얼굴을 표현하는 순간, 그 인물은 더 이상 익명의 몸이 아니라 나 자신의 얼굴을 닮아갈 것 같았다. 감정이 이미지로 충분히 걸러지기 전에 노출되고, 작업이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개인적인 고백에 가까워질 것 같은 불안도 있었다. 이 설명은 틀리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얼굴이 감정을 지나치게 직접적으로 전달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굳이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숨기고 싶은 순간이 있다. 나의 작업 속 인물은 바로 그 지점에 머문다.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감정이 아직 이름 붙여지기 전의 상태로 남아 있는 몸. 그래서 나는 얼굴 대신, 인물을 둘러싼 배경의 색이나 형태, 공간의 밀도를 통해 감정의 방향을 더듬어 가고자 했다.
이후의 작업에서 얼굴이 등장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다만 현재까지는 얼굴을 지우는 방식이 여전히 나에게 유효하다. 동시에 이 방식이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지, 그리고 무엇에 대한 판단을 의도적으로 미루고 있는지는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해야 할 문제라고 느낀다. 얼굴의 부재는 해방이 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회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내가 무의식적으로 반복해 온 선택, 즉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작업 방식의 근원을 되짚어 보기 위해 썼다. 이 글이 개인적인 동기와 감각의 출발점을 더듬는 글이었다면, 다음 글에서는 이 형식이 작품 안에서 어떤 구조로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효과적이거나 혹은 한계를 가지는지를 다른 작가들의 사례와 이론적 배경을 통해 조금 더 거리를 두고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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