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매체 기밀보는 1월 16일 보도에서, 미국의 관세 정책에 따른 충격을 상쇄하기 위해 유럽연합(EU)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무역 협정 체결을 가속화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인도네시아, 인도,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등과의 협상 진전이 두드러진다는 분석이다.
그동안 유럽은 미국을 핵심 무역 파트너로 간주해 왔다. 현재도 미국은 EU 전체 상품 무역의 17.4%, 수출의 20.6%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중심 통상 정책과 예측 불가능한 외교 노선은 브뤼셀로 하여금 새로운 시장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도록 만들었다. 이에 따라 EU 27개 회원국을 대표해 통상 협상을 담당하는 브뤼셀은 자유무역협정과 각종 조약 논의를 동시에 가속화하고 있다.
협상의 무게중심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실려 있다. 인도네시아와 인도,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뿐 아니라 칠레와 멕시코 등 태평양 연안 국가들도 주요 협상 대상으로 부상했다. 이러한 방향 전환은 EU가 2023년에 발표한 ‘경제 안보 전략’을 토대로 한다. 이 전략은 트럼프의 백악관 복귀 이전에 수립됐지만, 관세와 무역 제한 조치가 현실화되면서 유럽은 미국보다 더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무역 파트너를 찾을 필요성에 직면했다.
유럽의 아시아 접근은 브뤼셀 차원의 정책뿐 아니라 개별 회원국의 행보에서도 확인된다. 최근 독일 총리 메르츠의 인도 방문은 이러한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EU 최대 수출국인 독일은 인도와의 협력을 통해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를 낮추고, 트럼프 행정부가 자국의 지정학적 이해에 따라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초래한 무역 불확실성을 회피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같은 관계 개선의 결과로, 독일 자동차 산업을 대표하는 메르세데스-벤츠는 인도에서 마이바흐 GLS 초고급 모델을 생산하겠다고 발표했다. 인도는 이 차량을 미국 외 지역에서 처음으로 생산하는 시장이 됐다. 이는 양국 경제 협력의 상징적 성과로 평가된다.
현재 유럽연합은 인도의 최대 무역 파트너이며, 인도는 EU의 아홉 번째 교역 상대국이다. 트럼프 집권 이후 미·인 무역 협상이 정체된 상황에서, 유럽은 이를 전략적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비록 EU 전체의 대인도 수출은 감소했지만, 독일의 인도 수출은 오히려 4.2% 증가했다.
브뤼셀의 핵심 목표 중 하나는 인도가 유럽산 자동차와 의료기기, 와인, 증류주, 육류 등에 부과하는 관세를 대폭 인하하고, 지식재산권 보호를 강화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반면 인도는 노동 집약적 제품에 대한 무관세 접근을 원하고 있으며, 급성장 중인 자동차 및 전자 산업이 국제 시장에서 더 빠르게 인정받기를 기대하고 있다.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이 국가는 다자주의와 세계화를 지지하는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서 EU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무역 정책을 조정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현재 워싱턴이 글로벌 무역 흐름을 다시 장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유럽이 새로운 전략적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는 세계 무역 구조가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라는 것이다.
실제로 국제통화기금 자료에 따르면, 아시아 태평양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 엔진으로 부상했다. 이 지역은 세계 경제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으며, 인구는 43억 명으로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에 달한다. 2024년 기준 경제 규모는 35조 달러를 넘어섰고, 2028년 이전까지 연평균 4.5%의 성장률이 예상돼 유럽의 1.5~2% 성장률을 크게 상회할 전망이다.
또한 세계무역기구는 베트남, 멕시코, 폴란드, 터키 등이 전자·기계·운송 장비 분야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으며, 인도와 필리핀,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은 비즈니스 프로세스와 디지털 서비스 수출에서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WTO는 이러한 변화가 시장과 위험을 분산하고 새로운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신중한 정치적 선택의 결과라고 평가했다.
결국 유럽연합의 아시아 태평양 전략은 미국과의 무역 불확실성을 완화하고, 변화하는 글로벌 경제 질서 속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이는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 무역 질서가 다극화되는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차승민 기자 smcha@nv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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