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노규민 기자] "화나는데 서양 사람 흉내를 내서 한 작품 만들어봅시다."
서양 대작 영화들이 극장가를 점령, 조선 사람이 조선 옷을 입고 등장하는 활동사진에 관객이 몰리던 시기가 끝나갈 무렵, 춘사 나운규가 선배 이경손에게 한 말이다.
나운규(1902년생)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군 출신 영화 감독이자 배우다. 1926년 서울 단성사에서 상영한 '아리랑'으로 한국영화 역사에 묵직한 족적을 남겼다.
'아리랑'은 한국영화사에서 신화와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3.1 운동 고문 후유증과 충격으로 미쳐버린 대학생이 동네 사람을 괴롭히는 일본 경찰 앞잡이를 낫으로 죽이고 잡혀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운규는 주연이자 1인 3역, 감독, 제작, 각본까지 참여했다.
특히 나운규는 일본 신파극을 모방하거나 조선 고대소설을 원작으로 한 사극 등이 주를 이룬 기존 한국영화의 틀을 벗어나 과감한 도전을 실행했다. 극을 통해 조선의 어두운 현실을 드러내며 일제에 대한 저항 의지를 보여준 것은 물론, 일본 신파극 영향하에서 서구스타일을 과감하게 적용하면서 한국영화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무성영화 '아리랑'은 상영 당시 크게 흥행 했다. 식민지 시대 고통 받고 있는 국민들의 가슴을 어루만져 준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 됐다. 이후 1927년 일본에서도 개봉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방 이후 6.25 전쟁 전까지 전국에서 상영 했으며 서울에서만 9번 개봉 했다.
또한 영화 주제곡 '아리랑'도 큰 인기를 끌었다. 극 중 주인공이 줄에 묶여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는 마지막 장면에 울려 퍼지는 '아리랑' 은 압제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에게 진한 감동을 안겼다. 이후 영화에 사용된 노래는 온 국민에게 전파 됐으며 현시대까지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민족 음악으로 남았다.
이처럼 '아리랑'은 시대의 걸작이라 평가받고 있지만 그 누구도 본적이 없다. 6.25 이후 필름이 소실되어서다. 다만 어렵게 시나리오, 스틸 사진 등이 공개 됐고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던 배우 신일선이 제작비화 등 증언을 남기면서 영화 '아리랑'을 '상상' 정도 할 수 있는 정도가 됐다.
'아리랑' 이후 나운규는 '풍운아'(1926), '사랑을 찾아서'(1928), '벙어리 삼룡이'(1929) 등 대표작을 남겼다. 1927년에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 1937년 폐결핵으로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영화에 열정을 쏟았다. 하늘로 떠난 그해 '오몽녀'라는 걸작을 완성시켰다.
1966년 배우이자 감독 최무룡이 '나운규'를 맡고 박암, 김지미, 조미령, 엄앵란 등이 출연한 '나운규 일생'이 개봉 됐다. 또 1991년엔 이덕화가 '나운규'로 열연한 2부작 드라마 '춘사 나윤규'가 방영되기도 했다. 이처럼 후배들은 작품을 통해 그의 위대함을 조명했다.
1990년에는 한국영화감독협회 주관으로 춘사국제영화제가 만들어 졌다. 1회 춘사영화제에서는 안성기가 '남부군'으로 남우주연상, 심혜진이 '그들도 우리처럼'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또 '남부군' 정지영 감독이 감독상, '그들도 우리처럼'이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제29회 춘사영화제에서는 '어쩔수가 없다' 이병헌과 '악마가 이사왔다' 윤아가 남녀 주연상, '세계의 주인' 윤가은 감독이 감독상을 받았다.
< <사회자 "조선 영화가 세계로 진출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trong>사회자>
나운규 "세계 각국 사람이 다 느낄 수 있는 공통된 감성을 잘 붙잡아, 조선의 산하와 정조를 기조로 하고 만들어낸다면 나는 세계시장 진출에 어렵지 않을 줄 알아요. (중략) 우리 속에서도 명배우가 나고, 명감독이 나고, 큰 문호가 나서 본질적으로 그네들을 이길 생각을 해야 하겠어요.">>
-잡지 삼천리 1936년 11월호 인터뷰 내용
한편 올해 10월 1일은 '아리랑'이 서울 단성사에서 첫 선을 보인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뉴스컬처 노규민 pressgm@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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