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K-컬처가 더 이상 유행이 아니라 국가 전략이 된 시대, 문화정책의 방향성도 달라져야 한다.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2026년 신년사는 ‘한류의 자부심’을 넘어 ‘문화국가의 설계도’를 꺼내 든 선언이었다. 국민과 현장을 나침반 삼겠다는 최 장관의 메시지는 문화행정의 방향 전환을 예고하지만, 동시에 지금 정부 문화정책이 안고 있는 구조적 한계도 드러낸다. K-컬처를 성장 산업으로 키우겠다는 약속이 구호로 끝날지, 새로운 정책 질서로 이어질지, 그 갈림길에 문체부가 서 있다.
최 장관은 신년사를 통해 “국민과 현장을 나침반 삼아”라는 표현을 통해 문화행정의 기준을 현장으로 옮기겠다고 했다. 이 말은 지금까지 문화정책이 지나치게 중앙정부 중심, 기관 중심, 행정 편의 중심으로 운영돼 왔음을 역설적으로 인정하는 고백이기도 하다. 문화는 속도와 감각의 영역인데, 그동안 정책은 절차와 보고서의 논리로 그것을 다뤄 왔다. 현장이 나침반이 되려면 예술가와 제작자, 지역 문화기획자, 중소 콘텐츠 기업이 정책 설계 단계부터 참여하는 구조가 먼저 만들어져야 한다.
‘15도쯤 삐딱하게 바라보자’는 장관의 발언은 공직 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그러나 비판적 시선이 개인의 태도에 머물 경우 제도는 바뀌지 않는다. 현재 문체부의 정책 결정 구조는 여전히 위원회, 자문기구, 용역 보고서에 크게 의존하고 있고, 그 안에서 새로운 시도는 위험 요소로 취급된다. 관료적 안정성이 문화정책의 최우선 가치로 남아 있는 한, 삐딱함은 조직의 언어가 되기 어렵다.
암표 근절과 불법 유통 차단을 성과로 제시한 대목은 분명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이는 시장 질서를 바로잡는 출발선에 불과하다. K-컬처 산업이 성장하면서 플랫폼 독점, 기획사 집중, 수익 분배 불균형이 더 심화되고 있다는 현실은 신년사 어디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다. 창작자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말이 실질적 계약 구조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법 개정의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K-컬처를 미래 성장산업으로 키우겠다는 비전 역시 보다 구체적인 산업 정책과 연결돼야 한다. 현재 정부의 문화산업 지원은 여전히 제작비 보조와 해외 진출 지원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반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려면 데이터, IP 관리, 글로벌 유통망, 금융 지원이 결합된 산업 전략이 필요하다. 문화정책이 산업정책과 분리돼 있는 구조를 그대로 둔 채 ‘성장산업’이라는 말만 반복해서는 실질적 변화가 일어나기 어렵다.
K-관광 3천만 명이라는 목표도 숫자만 놓고 보면 화려하지만, 관광의 질과 구조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대한 답은 빠져 있다. 현재 한국 관광은 대도시, 쇼핑, K-팝 중심으로 쏠림이 심하다. 지역 문화와 생활 문화, 예술 자산을 관광과 연결하지 못하면 방문객 수는 늘어도 체류 시간과 소비는 제한될 가능성이 크다. 문화부가 관광 정책을 총괄하는 이유는 바로 이 접점을 설계하라는 데 있다.
스포츠를 “더욱 신뢰받도록 세우겠다”는 발언 역시 선언적 표현에 머문다. 한국 스포츠는 승부 조작, 학폭, 비리, 불투명한 운영 구조로 사회적 신뢰를 잃어 왔다. 이는 윤리 교육이나 캠페인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협회 구조 개편, 외부 감시 시스템, 선수 권리 보호 장치 같은 제도 개혁이 뒤따르지 않으면 신뢰 회복은 요원하다.
장관이 강조한 ‘국민과의 소통’도 현재 정부 문화정책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다. 정책 발표는 많지만, 시민과 창작자가 정책 과정에 참여할 통로는 여전히 좁다. 공청회와 온라인 의견 수렴이 형식적 절차로 작동하는 현실에서, 문화행정은 쉽게 자기 언어에 갇힌다. 정책 실험을 지역 단위로 허용하고, 실패 사례까지 공개하는 구조가 마련돼야 신뢰는 쌓인다.
문체부가 K-컬처의 컨트롤타워가 되겠다면, 지원자이자 규제자인 이중적 위치에 대한 재정의도 필요하다. 지금의 문체부는 예산을 배분하면서 동시에 산업을 관리하고, 창작을 지원하면서 동시에 검열 논란을 부르는 정책을 집행해 왔다. 이 모순을 해소하지 않고서는 문화강국이라는 구호가 창작자에게는 또 다른 통제로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다.
올해 최 장관의 신년사를 통해 정부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비교적 분명하게 제시했지만, 어떻게 갈 것인지는 아직 모호하다. 방향과 속도, 권한과 책임, 중앙과 지역의 역할 분담이 정책 문서로 구체화되지 않는다면, K-컬처라는 말은 다시 정치적 수사로 소진될 수 있다.
문화정책은 성과가 늦게 드러나고, 실패의 비용이 크다. 그래서 더더욱 장기적 설계와 정치적 일관성이 요구된다. 최휘영 장관의 신년사는 그 출발점에 놓인 하나의 선언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 선언을 제도와 예산, 구조 개편으로 옮기는 실질적인 정책 선택이다. 그 지점에서 문체부의 진짜 시험이 시작된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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