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고요한 온기가 서서히 번져간다. ‘겨울의 빛’은 한겨울의 끝자락에서 조용히 다가와 관객의 마음에 오래 머무는 영화다. 웜메이드 성장 드라마라는 장르적 정의보다 먼저 다가오는 것은, 쉽게 말로 설명되지 않는 정서의 결이다.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대상 수상이라는 성과는 이 작품이 지닌 완성도를 증명하지만, 영화가 남기는 여운은 수상 경력을 넘어선다. 새해 극장가에 등장하는 작품은 크지 않은 목소리로, 그러나 분명한 울림을 남긴다.
영화는 열여덟 소년 다빈의 겨울을 따라간다. 넉넉하지 않은 가정 형편과 아픈 동생, 그리고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이르게 어른의 문턱에 서게 된 한 인물의 시간이다. 다빈은 공부를 잘하지만 꿈을 말하기에는 삶이 너무 현실적이다. 영화는 이 소년에게 특별한 영웅 서사나 극적인 반전을 부여하지 않는다. 대신 하루하루를 견디는 얼굴, 말보다 먼저 굳어지는 표정, 쉽게 드러내지 못한 감정을 차분히 따라간다.
‘겨울의 빛’이 인상적인 것은 감정을 밀어붙이지 않는 태도에 있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울어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상황을 설명하거나 판단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다빈이 집과 학교, 아르바이트 현장을 오가는 평범한 동선 속에서 카메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그 거리 덕분에 인물은 연출된 캐릭터가 아니라, 지금 이곳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은 현실의 얼굴로 다가온다.
조현서 감독의 연출은 단편 작업에서 보여준 미덕을 고스란히 이어받는다. ‘나무’와 ‘터’를 통해 상실과 책임, 선택의 순간을 집요하게 응시해 온 감독은 장편 데뷔작에서도 과장과 설명을 배제한다. 인물의 감정은 사건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드러난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감정은 더 또렷해지고, 설명되지 않은 여백은 관객의 기억과 경험을 자연스럽게 불러낸다.
영화에서 겨울은 계절적 배경에 그치지 않는다. 겨울은 인물이 처한 상태이자 감정의 은유다. 차갑지만 견뎌야 하고, 끝이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는 지나간다는 시간의 감각이 화면 곳곳에 스며 있다. 영화는 그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빛’을 발견하려 애쓰지 않는다. 대신 아주 작은 온기가 남아 있는 순간들을 놓치지 않는다. 그 미세한 온기가 쌓여 결국 영화의 제목이 된다.
배우 성유빈의 연기는 이러한 연출의 결을 정확히 따라간다. 감정을 폭발시키기보다 눌러 담은 얼굴, 말보다 시선이 먼저 반응하는 순간들이 다빈이라는 인물을 설득력 있게 완성한다. 그의 연기는 슬픔을 보여주기보다 슬픔을 견디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 절제된 표현 덕분에 다빈의 선택과 망설임은 더 진하게 다가온다.
조연 배우들의 연기 역시 영화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한다. 차준희, 이승연, 임재혁, 강민주 등은 각자의 자리에서 과하지 않게 인물의 관계를 채운다. 누구 하나 튀지 않지만, 그 균형 덕분에 다빈을 둘러싼 세계는 현실적인 밀도를 얻는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쌓인 애증과 책임,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감정의 층위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공개된 보도스틸 속 장면들은 영화가 지향하는 세계를 잘 보여준다. 특별할 것 없는 집과 학교, 일상의 공간 속에서 포착된 다빈의 모습은 또래의 평범한 하루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쉽게 꺼낼 수 없는 무게가 스며 있다. 동생을 바라보는 시선, 홀로 멈춰 서 있는 순간들은 한 소년이 감당하고 있는 현실을 조용히 드러낸다. 이 영화는 설명하지 않고도 이해하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겨울의 빛’은 성장 영화이지만, 성장의 결과를 성급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어른이 되는 순간을 선언하지도, 명확한 답을 내려주지도 않는다. 대신 유예된 시간 속에서 인물이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포기하게 되는지, 그 과정 자체를 바라본다. 그 시선은 열여덟이라는 특정한 나이를 넘어, 누구나 한 번쯤 지나왔던 불완전한 시절로 확장된다.
작품이 주는 위로는 따뜻하다는 말로 쉽게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손을 꼭 잡아주는 위로가 아니라, 옆에 조용히 앉아 함께 겨울을 견뎌주는 태도에 가깝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관객의 마음 한편에 남아, 자신의 겨울을 떠올리게 만드는 힘이다.
섬세한 각본과 절제된 연출, 그리고 진심 어린 연기가 만나 완성된 ‘겨울의 빛’은 2026년 2월, 조용하지만 분명한 존재감으로 극장가를 채울 예정이다. 눈부시지 않아도 충분히 따뜻한 빛, 그 빛은 겨울의 끝에서 오래도록 남아 관객의 시간을 비춘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Copyright ⓒ 뉴스컬처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