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발견이 위대한 논문으로 남는 것과 세상을 바꾸는 제품이 되는 것 사이에는 거대한 심연이 존재한다.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이를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이라 부른다. 지난 11년 간, 한국의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연구자들이 이 계곡을 건널 수 있도록 돕는 정교한 다리를 건설해왔다. 바로 '공공기술기반 시장연계 창업탐색 지원사업', 일명 '텍스코어(TeX-Corps)'다.
최근 서울에서 열린 '2025 실험실창업페스티벌'은 이 프로그램이 만들어낸 조용한 혁명의 현장이었다. 이곳에 모인 과학자들의 목표는 단 하나, "연구실 밖으로 나가라(Get out of the building)"는 명제를 실천하여 그들의 기술이 시장에서 통용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데이터 수집을 넘어 생명을 구하는 기술로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AI 반도체 스타트업 '헤일로(Halo)'였다. 이들은 단순한 심전도 측정기를 넘어선 '실시간 위기 대응 시스템'을 선보였다.
기존의 심전도 장치들이 데이터를 수집하고 사후에 분석하는 '기록자'의 역할에 머물렀다면, 헤일로는 자체 개발한 저전력 바이오 프로세서와 AI 알고리즘을 결합해 '감시자'의 역할을 자처했다. 헤일로의 대표는 "우리의 목표는 데이터를 쌓는 것이 아니라, 심정지나 심실세동 같은 위험 징후를 실시간으로 포착해 환자에게 경고하고 골든타임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피부에 부착하는 패치 형태의 이 디바이스는 전문의 수준의 모니터링 능력을 칩셋에 내장(On-device AI)하여, 물리적인 제약 없이 일상생활 속에서 심장 질환을 관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이는 반도체 공학이 의학적 응급 상황과 만났을 때 어떤 시너지를 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푸드 테크, 마이크로 캡슐에 혁신을 담다
또 다른 주목할 만한 기업은 '엥겔웰리움(Engelwelium)'이었다. 이들은 당뇨 인구가 급증하는 현대 사회의 핵심 키워드인 '혈당 스파이크' 관리에 주목했다.
엥겔웰리움의 접근 방식은 재료공학적이다. 여주나 오미자 같은 천연 혈당 조절 성분을 식이섬유 소재의 마이크로 캡슐 안에 가두는 기술을 개발했다. 핵심은 '보존성'과 '무미(無味)·무취(無臭)'다. 고온·고압의 가공 과정에서도 활성 물질이 파괴되지 않으며, 음식 본연의 맛을 해치지 않는다.
이 기술은 3D 푸드 프린팅과 결합하여 확장성을 가진다. 캡슐화된 분말을 반죽(Paste) 형태로 만들어 프린터 노즐을 통해 출력하면, 개인 맞춤형 기능성 식품이 탄생한다. 이는 병원이나 요양원 식단을 넘어, 향후 우주 식품이나 전투 식량과 같은 극한 환경용 식품 산업으로의 진출 가능성까지 시사한다. 실제로 지난 국제 우주 대회(IAC)에서 데이터 기반 우주인 식품이 화두가 되었던 점을 고려하면, 엥겔웰리움의 시도는 글로벌 푸드 테크 트렌드와 궤를 같이한다.
생존율 54%의 비밀: 시장 검증
2015년 시작된 텍스코어 프로그램은 지금까지 864개 팀을 지원하고 435개의 기업을 탄생시켰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들 기업의 5년 생존율이 54%에 달한다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인 기술 스타트업의 생존율을 상회하는 수치다.
성공의 열쇠는 '고객 발견(Customer Discovery)' 과정에 있다. 이날 만난 창업자들은 하나같이 "책상 위가 아닌 현장에서 고객을 만난 경험"을 결정적 계기로 꼽았다. 이번 페스티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플로트바이오사이언스'의 정영도 대표와 '에이브람스'의 손창호 대표 역시 텍스코어의 체계적인 시장 검증 과정과 멘토링이 기술을 사업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입을 모았다.
실험실 밖으로의 여정
이번 행사는 단순한 성과 공유회를 넘어, 2,600여 명에 달하는 텍스코어 동문 네트워크의 발대식이기도 했다. 선배 창업가들이 겪은 시행착오와 노하우가 후배들에게 전수되는 이 생태계야말로 한국 과학 기술 창업의 진정한 자산이다.
AI, 바이오, 로봇, 신소재 등 한국의 미래 먹거리가 될 기술들이 이곳에 집결해 있었다. 하지만 가장 빛난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을 들고 세상 밖으로 나와 부딪히고 깨지며 시장의 언어를 배운 과학자들의 용기였다.
"기술이 연구실에 머물면 논문이 되지만, 세상 밖으로 나오면 혁신이 된다." 2025년의 실험실창업페스티벌은 이 단순한 진리를 증명하는 거대한 실험실이었다. 이제 우리는 이들이 건너온 다리 너머에서, 어떤 유니콘 기업이 탄생할지 지켜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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