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에 있는 맛집을 드나드는 남자의 후기다. 유명한 곳도, 숨겨진 곳도 간다. 재료와 요리가 탁월하면 선별한다. 주인장이 친절하면 플러스다. 내돈내산이며 가끔 술도 곁들인다. 요즘처럼 자극적인 맛에 익숙해진 입에는 정성이 담긴 음식이 들어가야 정화된다고 믿는다. [편집자 주] |
2026년을 맞아 겨울 한파가 몰아쳤다. 외투 깃을 세운 도시인들의 어깨는 자연스레 움츠러든다. 이럴 때 사람들은 본능처럼 온기를 찾는다. 발길은 어느새 뒷골목으로 향한다.
서울을 떠돌며 국밥 두 그릇을 마주했다. 상암동의 ‘도락’과 을지로의 ‘산수갑산’이다. 서로 다른 골목, 다른 세대의 얼굴이다. 그러나 이 겨울을 버티는 방식만큼은 닮아 있었다.
상암동, 과거의 기품으로 끓인 효종갱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에 자리한 도락에 들어서면 주변 풍경이 잠시 잊힌다. 방송국과 대기업 건물로 둘러싸인 동네라는 사실도 희미해진다. 메뉴 이름부터 그렇다. ‘탐라효종갱’이다.
효종갱은 ‘새벽종이 울릴 때 먹는 국’이다. 밤새 술을 마신 양반들이 이른 새벽 남한산성에서 성문 안으로 배달해 먹었다는 고급 해장국이다. 도락의 효종갱은 이 귀족적인 뿌리에 제주, 즉 탐라의 정서를 더했다.
내장이 없는 선지해장국과 콩나물국밥을 결합한 듯한 구성이다. 검붉은 선지는 부드럽고 탱글하다. 알코올에 지친 몸에 철분과 생기를 불어넣는다. 콩나물과 계란이 어우러진 얼큰한 국물을 들이키면 뜨거운 기운이 단번에 내려간다. 쫄깃한 당면은 구수함을 더한다.
알코올을 분해하느라 소진된 몸에 비타민과 조효소를 채워 넣는 음식이다. 과학 이전에 경험으로 축적된 민중의 처방이다. 소주 한 잔을 곁들이면 국은 술안주가 되고 술은 다시 국을 부른다. 취함과 해장이 한 상에서 공존한다.
해장(解酲)이라는 말을 되짚는다. 본디 ‘해정’이라 했다. 술에 취해 어지러운 기운을 푼다는 뜻이다. 어젯밤 소주잔에 털어 넣은 울분과 회한, 내일에 대한 막막함을 뜨거운 국물로 씻어내는 의식이다. 비로소 제정신을 찾기 위한, 처절하고도 거룩한 행위다.
우리 민족만큼 해장에 진심인 이들이 또 있을까. 조선 시대 신윤복의 주막 그림 속 주모도 솥 앞에 앉아 쉴 새 없이 국자를 놀린다. 한량들의 속을 달래기 위해서다. 그 시절부터 이 땅의 사람들은 폭음을 주저하지 않았고, 해장 문화는 전 세계에서도 유례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을지로, 노동의 기억을 품은 순대정식
발길을 옮겨 을지로 골목으로 들어선다. 기름때 묻은 공구들이 늘어선 풍경이 펼쳐진다.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실핏줄 같았던 이곳은 여전히 노동의 가치를 증명한다. 골목 한가운데 세월의 더께를 얹고 앉아 있는 ‘산수갑산’은 민중의 고향집 같다.
순댓국은 노동자 계급의 희로애락이 담긴 음식이다. 돈육의 살코기와 지방은 부유한 이들의 몫이었다. 머릿고기와 내장, 피 섞인 순대는 주머니 가벼운 서민들의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설렁탕 한 그릇이 부담스러웠던 시절, 사골 국물에 고기 건더기를 푸짐하게 담아낸 순댓국은 노동자들에게 큰 보상이었다.
산수갑산의 순대정식은 이 질긴 역사를 세련되고 정직하게 계승한다. 밥과 국물, 순대모둠이 따로 나온다. 한 그릇에 몰아넣지 않는다. 하나씩 내는 방식은 이 음식이 ‘저렴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먹는 것’임을 말해준다.
대창순대와 간, 살코기, 오소리감투가 위풍당당하다. 돼지 특유의 잡내를 잡기 위해 과한 향신료를 쓰지 않는다. 정성스러운 손질로 맛을 깔끔하게 만들었다. 특히 대창의 쫄깃한 식감 속에 가득 찬 선지와 채소의 조화는 압권이다.
다대기가 풀린 국물은 뽀얗고 두텁다. 밥을 말아 한 숟갈 뜨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김치와 깍두기에 저절로 젓가락이 간다. 고추를 씹어 입이 얼얼해지면 다시 국물과 밥으로 돌아간다.
힘든 삶을 견디면서도 품위를 놓지 않으려 애써온 우리 모습이 이 국밥 한 그릇에 담겼다. 돼지 부속은 도축 뒤 남은 부산물이지만, 이곳에서는 ‘남은 것’이 아니라 ‘모아진 것’이다.
원가는 싸도 영양과 포만감은 귀하다. 순댓국은 중장년에게는 가장 믿음직한 술안주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청년에게는 든든한 저녁이다.
소주는 이 집 정식을 완성하는 화룡점정이다. 한 잔 들이키는 순간 하루의 피로가 휘발된다. 겨울은 깊고 인생은 고해(苦海)라지만, 따뜻한 국밥 한 그릇과 정이 있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상암동의 효종갱이 과거의 기품으로 오늘의 나를 위로한다면, 을지로의 순대정식은 투박한 생명력으로 오늘의 나를 일으켜 세운다. 두 그릇의 국밥은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흐른다. 모진 세월을 견디며 살아남은 민초들의 끈질기고 눈부신 생존의 기록이다.
겨울의 서울에서 국밥집 문을 여는 사람들은 저마다 사연을 안고 들어온다. 일에 치인 하루, 술로 넘긴 밤, 혹은 아무 이유 없는 추위. 뜨거운 국물은 잠시 평등을 만든다. 직함도, 수입도, 말수도 내려놓고 같은 온도를 마신다. 그릇 바닥이 보일 즈음이면 내일을 버틸 힘이 조금 남는다. 추운 겨울, 국밥과 소주는 그렇게 서민을 달랜다. 오늘을 견디게 하고, 다시 하루를 시작하게 하면서.
여성경제신문 이상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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