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허드슨이 페이스메이커 박재우 선수의 뒤를 바싹 붙어 달리고 있다.
이렇게 크다고?
」지난 11월 30일 ‘브레이킹 서브2 시즌 2’가 열린 서울체육고등학교에는 온통 처음 보는 광경뿐이었다. 일단 400m 트랙의 가장자리를 따라 촘촘한 간격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조명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촘촘하게 설치된 이 조명들은 스타트 지점에서부터 켜지기 시작하더니 마치 트랙 안에서 선수처럼 일정한 페이스로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 여러분이 보고 있는 이 불빛은 세계육상연맹과 대한육상연맹에서 도입해 활용하고 있는 ‘웨이브 라이트’라는 기술인데요, 이게 기록 제조기입니다.” 중계석에서 마이크를 잡은 배성훈 코치가 말했다.
트랙에서 달리는 불빛은 하나가 아니었다. 선수들과 함께 달리는 불빛들은 녹색과 빨간색이었다. “저희 선수들과 거의 비슷하게 달리고 있는 저 초록색이 우리가 도전하는 2시간 페이스고, 그 뒤에 따라오는 빨간색이 엘리우드 킵초게가 2019년 비엔나에서 열린 'INEOS 1:59 Challenge'에서 세운 1시간59분40초의 속도를 환산한 조명입니다.” 중계석에서 ‘브레이킹 서브2’의 공동 해설위원을 맡은 김영진 러닝 코치가 이어 말했다. 총 400개의 멀티컬러 LED가 1m 간격으로 설치된 이 ‘웨이브 라이트’는 움직이고 설치하는 데만도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다. 그뿐만이 아니다. 트랙 안쪽 한편에는 대형 컬러 스크린 전광판이 설치되어 있었고, 제대로 된 음향 장비로 경기장 안을 가득 채울 중계 부스, 관람객들에게 음료를 제공하는 음료 부스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대형 스포츠 브랜드에서 준비한 러닝 축제 이상의 규모에 깜짝 놀라 든 생각은 하나였다. ‘브레이킹 서브2’가 이렇게 덩치가 크다고?
‘브레이킹 서브2’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14명의 비선출 마스터스 러너들이 한 랩에 1km씩 릴레이로 각각 세 번의 랩을 돌아 마라톤 풀코스인 42.195km를 완주할 수 있을까?” 1번부터 14번까지의 주자들이 1km씩 총 세 세트를 릴레이로 뛰고 마지막 세트의 마지막 주자가 총 1.2km를 뛰어 42.195km를 채우는 방식이다. 이를 성공하기 위한 페이스는 1km당 2분 50초 안쪽. 100m로 환산하면 정확하게 17초다. 14명이 1km를 100m 17초의 페이스로 계속 달려야 성공이다. 러닝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1km를 달려서 3분 안에 들어오는 것부터가 일반인에게는 거의 불가능의 영역이다. 한 바퀴를 뛰고 나면 대략 35분의 휴식이 주어진다지만, 이미 쌓여버린 젖산을 분해하고 숨을 돌리는 데는 전혀 충분하지 않다. “‘일반인이 킵초게 페이스로 얼마나 달릴 수 있을까’ 같은 실험 영상을 본 적이 있을 거예요. 100m를 대략 17초에 끊는 페이스인데, 보통은 1분도 못 버티죠.” 이 행사를 주최한 ‘262웨이브’의 원형석이 말했다. SNS의 페르소나인 ‘스톤’으로 더 유명한 그는 14명의 주자 중 첫 번째로 뛰었다. 참고로 첫 번째 세트에서 그는 2분 46초를 기록했고, 두 번째에는 2분 44초, 세 번째에는 2분 42초를 기록했다. 엄청난 페이스였다.
두 시간의 벽을 깨는 데 성공한 뒤 응원한 팬들과 함께 찍은 단체 사진.
축제의 발견
」브레이킹 서브2 ‘시즌 2’라고 이름 붙인 데는 실패의 역사가 있다. 지난 4월 5일 같은 도전에서 2시간을 살짝 넘긴 2시간 2분 46초의 기록으로 실패를 기록했다. 2분 46초라고는 하지만 이 선수들의 페이스로 보면 1km의 거리가 벌어진 것. “그날 실패의 원인 중에는 날씨가 정말 컸다고 봐요.” 원형석의 말이다. 날씨를 제쳐두면, 두 번째 도전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함성이었다. 이날 일반인 관람객 600명은 레이스 펜스 바깥을 가득 채운 채,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들을 따라 움직이며 응원의 목소리를 보냈다. 262웨이브에 따르면 500장의 유료 티켓은 진작에 완판됐다. 주최 측이 이들에게 선사하고 싶었던 건 ‘관람’의 경험이었다. “도전 자체도 중요하지만 육상에서 재미를 느끼며 러닝을 하나의 축제로 즐길 수 있게 하고 싶었어요.” 262웨이브의 김용수 PD가 말했다. 262웨이브는 러닝을 중심으로 하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콘텐츠 제작사지만, 이번에는 대형 행사를 자체적으로 기획했다. 이날 그는 호버보드와 전동 바이크를 타고 트랙 안을 날아다니며 레이싱 장면을 카메라에 담으면서도 행사 진행을 신경 써야 했다. 이 모든 것이 기록으로 경쟁하는 엘리트 육상경기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들이었다. “맞아요. 예를 들면 전국체전 같은 아마추어 엘리트들의 육상 경기에도 해설이 있지만, 그건 텔레비전 시청자를 위한 방송이죠. 지금 우리가 하는 것처럼 그 해설이 장내 방송으로 나오지는 않아요.” 김 PD가 이어서 설명했다. “장내 방송으로 선수를 응원하기도 하고, 관객들의 호응을 유도하기도 하고, 또 펜스도 선수들이 뛰는 트랙에서 최대한 가깝게 붙여서 설치하고 안전 요원을 배치한 것도 모두 관람객들이 정말 축제처럼 즐기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262웨이브의 또 다른 주축 멤버인 리노 작가는 이 ‘몰입형 축제’를 만들기 위해 기물과 부스의 배치배너 등을 직접 디자인하는 등 축제를 공동총괄했다.
브레이킹 서브2는 축제이면서 무대였다. 마치 가수가 노래를 하기 위해 무대에 오르듯 셀러브리티가 된 러너들이 트랙에서 달렸다. 러닝계의 아이돌이 스톤이라면 안은태에겐 격정의 팬덤이 있었다. 여러 팬들이 그를 위한 사인 보드를 들고 나와 응원의 목소리를 보냈다. 그는 2시간 29분대의 기록으로 비선출 마스터스 10명 안에 들어가는 최고 수준의 러너다. 그는 “마라톤이나 러닝이 고통이나 극복의 키워드로 소비되는 것도 좋지만, SNS를 통해서만 알던 사람들이 실제로 교류하는 동네 잔치 같은 장이 되면 좋겠어요”라며 “다양성이 확장된 것 같아 너무 반가웠죠”라고 밝혔다. 드라마틱한 서사를 지닌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기도 했다. 부산 동래구의 소방관인 감진규 선수가 달릴 때는 관람객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해설위원들이 그의 사연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2월, 브레이킹 서브2 시즌 1의 도전을 앞둔 시점에서 잠수 훈련을 하던 중 심정지를 경험했다. 다행히 주변에 있던 응급처치에 익숙한 동료 소방관들의 도움으로 신체 기관에 손상이 가기 전에 발견되었고, 회복 후 시즌 2에 참가했다. “지금은 예전보다 더 건강한 것 같아요.” 이날 마지막 랩에서 그가 낸 기록은 1km를 2분 39초로 전체 랩 중 최단 시간을 기록했다.
왼쪽부터 신정식, 김종진 선수, 권은주 감독, 원형석, 안은태, 김보건, 김관우 선수. 육상 꿈나무 지원 기부금을 전달하는 모습.
이제 막 입시를 마친 고등학생 러너 김종진 선수도 눈길을 끌었다. 아직 성장기라 풀코스 마라톤을 뛰어본 적이 없는 그의 10km 기록은 무려 32분27초. 그가 이렇게 뛰게 된 이유는 다이어트다. “중학교 졸업할 때 80kg이었어요. 고1 10월에 살을 빼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서부터 뛰기 시작했어요.” 김종진 선수가 말했다. 그는 간호학과 진학을 앞두고 있다. 대학에서 간호학을 전공하고 상급종합병원의 간호사로 일한 경험이 있는 원형석이 그의 진로를 앞장서 말리고 있는 한편, 수많은 엘리트 코치들로부터 엘리트 선수 입단의 제안 받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조금 다르다. “은태 형과 형석이 형을 보면 다른 직업을 가지면서도 러닝을 열심히 하는 모습을 통해 SNS로 대중과 소통하면서 행복한 삶을 사시는 게 좋아 보였어요.” 그가 말했다. “솔직히 제 수준이 지금 엘리트 코스에 들어간다고 해도 최상급이 된다는 보장도 없었고요. 오늘 뛸 때 보니까 엘리트 선수들은 레벨이 달라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지만 대한민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러닝을 하다가 대한민국 마스터스 1위가 된 로버트 허드슨 역시 한국 러닝 계의 슈퍼스타다. 전주에 있는 전북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는 이유로 허드슨의 별명은 ‘비빔밥 러너’지만, 비빔밥을 정말 좋아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는 브레이킹 서브2가 정말 특별한 축제였다며 “이날 같이 뛴 러너들은 사실 한국의 마스터스 중에서 최상급에 있는 사람들이었고, 사실 마라톤을 뛸 때면 서로의 경쟁자예요. 그런데 오늘은 마치 형제 같은 분위기였죠. 생각해보면 우리는 가끔은 라이벌이지만, 대부분은 형제예요.” 그의 말이다. 이들 외에도 알 만한 사람들은 아는 러너인 김덕하, 김보건, 오요한, 이종현, 유지훈, 김관우, 박경민, 김진명, 신정식이 이날의 레이스를 함께했으며, 김민욱, 오혜성이 예비 선수로 자리를 지켰다.
김종진 선수의 질주. 이날 김종진은 마지막 랩에서 1km를 1분 41초에 달렸다.
심정지를 겪었던 감진규 선수는 이날 대회 최고 랩타임을 기록했다.
엘리트의 재발견
」“그런데 오늘 느낀 건 엘리트 선수들이 얼마나 대단한지였어요.” 허드슨이 덧붙였다. 이날 코오롱 인더스트리 소속의 박민호와 이정국, 영천시청 소속의 박재우와 최재경이 두 번째 세트부터 돌아가며 800m씩 2분 50초의 페이스 메이킹을 해줬다. “한국의 엘리트 선수들이 지금 기록이 잘 나오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막상 실제로 뛰어보니 선수들의 엄청난 피지컬은 우리와는 완전히 달라요. 박민호, 박재우 선수 뒤에서 달리는데 마치 내가 코끼리라도 된 것처럼 느리게 느껴졌어요.” 그의 말이다. 원형석 역시 이 지점을 가장 날카롭게 짚었다. “엘리트 선수들은 우리나라에서 심하게 저평가 받고 있어요”라며 그는 “이 대회에서 엘리트 선수들이 뛰는 모습을 보여줘서 관객들이 ‘아, 엘리트들은 진짜 다르구나’라는 걸 느끼게 해주고 싶었어요”라고 말했다. 실제로 최재경은 마치 다리에 스프링이라도 달린 듯 앞뒤를 모두 살피며 페이스를 메이킹했다.
이번 행사에서 선수들의 페이스 분배 등을 감독한 권은주 감독 역시 엘리트와 마스터스의 관계에 대해 느낀 게 많다. 그는 선수들을 모아 실제 시뮬레이션 훈련을 진행하고 당일 현장에서 선수들의 페이스를 관리했다. 지난 브레이킹 서브2 시즌 1에서 몇몇 선수들이 마지막 세트에 퍼진 이유는 첫 번째 바퀴에 너무 흥분해 오버 페이스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첫 번째 랩에서는 다들 오버 페이스를 해버렸어요. 성패에는 두 번째 세트가 가장 중요했는데, 그걸 잡기 위해 선수들에게 당부했고, 아주 잘 방어해줬죠.” 권 감독의 말이다. “이런 대회를 통해서 아마추어 엘리트 선수들이 더 널리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관중과 접점을 만들고 팬덤이 생기고 그 팬덤의 응원을 등에 업으면 선수들이 운동을 더 열심히 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질 거라고 생각해요.” 권 감독이 이어 말했다. 일부 러닝 갤러리에서는 마스터스 선수의 최고 기록과 엘리트 선수들의 기록을 비교하며 엘리트 선수들을 깎아내리는 경향이 있다. “엘리트 선수들은 대체 뭐 하느냐는 질타는 도움이 되지 않아요. 예전에는 선수들이 SNS를 통해 소통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됐고, 이제는 이런 제약이 풀렸죠. 엘리트 선수들도 대중과의 접점을 만들어 나가다 보면, 일반부의 발전에 힘입어 함께 성장할 것이라고 봐요.” 그녀의 말이다.
이날 진행을 공동 총괄한 262웨이브의 김용수PD가 결승선에서 플래그를 들고 있다 .
다시, 던지는 질문
」다시 돌아가 보면, ‘브레이킹 서브2’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했다. 아니, 단순한 줄 알았다. “14명의 비선출 마스터스 러너들이 한 랩에 1km씩 릴레이로 각각 세 번의 랩을 돌아 마라톤 풀코스인 42.195km를 완주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했지만, 막상 현장에서 나는 “러닝은 새로운 축제가 될 수 있을까?”라는 또 다른 의문에 답하고 있었다. “저희도 그런 걸 생각 중이에요. 국제 육상경기인 다이아몬드 리그처럼 관람객들이 돈을 내고 보러 오는 축제 분위기의 이벤트를 만들고 싶어요.” 262웨이브의 김용수 대표가 말했다. “사실 이번에 관람료 1만원을 받은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한 게 아니었어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서울체육고등학교도 저희가 500만원을 형편이 어려운 체육 전공 학생에게 기부하는 조건으로 운동장을 빌려주셨고, 웨이브 라이트 업체도 실비로 도와주셨고, 해설위원들도 좋은 마음으로 정말 차비 정도 받고 와주셨어요. 게토레이 등의 브랜드 협찬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겠죠?” 원형석이 말했다. 게토레이, 러닝라이프, 100%, 퍼포맥스, 얼티밋 포텐셜, 라로슈포제로 등의 브랜드가 이 대회를 도왔다. 그는 “사실 수익을 내려 던 게 아니었고, 오히려 저희 제작비를 크게 지출했어요”라며 “그러나 이런 기회가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축구나 야구처럼, 좋아하는 러너가 뛰는 경기를 보러 갈 수 있는 기회요”라고 덧붙였다. 아, 맞다. 그래서 결과는? 이날 14명은 1시간 58분 7초를 기록하며 두 시간의 벽을 깼다. 그러나 그 하루는 기록보다 오래 남을 질문을 남겼다. 러닝은 얼마나 더 재미있어질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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