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기도 고양시에서 작은 공장을 운영하는 김장석 씨(52·남·가명)는 올해 초 황당한 일을 겪었다. 현금 융통 때문에 중소벤처기업부의 중소기업 정책자금 대출을 고민하던 중 주변 지인으로부터 한 대행업체를 소개받았다. 김 씨는 정책자금 신청 대행 자체가 불법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신청 방법도 복잡한데다 혹시나 모를 탈락 가능성도 있다 보니 상담 정도는 받아보기로 했다. 해당 업체는 상담 과정에서 신청 탈락 걱정 없이 무조건 정책자금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며 매출, 직원수 등 몇 가지 정보를 물었다. 그리고는 상담 말미에 수수료 명목으로 종신보험 상품 가입을 제안했다. 찝찝한 기분을 느낀 김 씨는 결국 다른 방법으로 자금을 조달했다.
#2. 서울에서 작은 홍보물 제작 업체를 운영하는 이유정 씨(39·여·가명)는 지난 여름 납품대금 문제로 대출을 알아보던 중 중소벤처기업부의 중소기업 정책자금 지원 정책을 알게 됐다. 시중은행에 비해 이자가 낮은 점이 매력적이라고 느껴 곧장 신청을 했으나 약 한 달 후 지원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정된 재원 때문에 어쩔 수 없겠거니 하고 다른 방법으로 자금을 융통했다. 그런데 약 보름 정도 지난 후 비슷한 사업체를 운영하는 지인으로부터 어이없는 말을 듣게 됐다. 민간 정책자금 중계 업체에 수수료를 주고 신청해 지원 대상에 선정됐다는 것이었다. 비슷한 규모에 오히려 실적이나 직원 수도 적은데도 불구하고 선정됐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정책자금 지원자 선정 방식에 불신이 생겼다.
최근 중소기업·소상공인 등을 대상으로 한 각종 정책자금 지원 정책에 대한 불신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수수료나 보험상품 가입 등을 대가로 정책자금을 중계·대행해주는 브로커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어서다. 특히 단속·처벌 강화 등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브로커가 사라지긴 커녕 오히려 더욱 기승을 부리다 보니 일부러 방치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되는 실정이다. 정책자금 중계·대행은 경제적 위기에 처한 이들의 간절함을 악용해 그들에게 온전히 돌아가야 할 혜택을 일부 편취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악질적인 행위로 평가된다.
정책자금 브로커 근절 엄포에도 수년째 영업 지속, 신고 포상제 두고도 실효성 의문부호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오세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정책자금 제3자 부당개입 신고현황'에 따르면 2019년부터 지난 2023년까지 적발된 정책자금 불법 브로커 건수는 27건이었다. 정책자금 불법 브로커 유형별로 살펴보면 정책자금 상담 및 알선을 대가로 보험계약을 요구하는 부당 보험영업 행위가 18건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정부기관 사칭 4건, 계약 불이행 4건, 대출심사 허위 대응 1건 등의 순이었다. 그러나 신고센터를 통해 적발된 27건 중 13건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 나머지 역시 금감원 등 정부 기관에 신고(9건)하거나 주의(5건)를 주는 수준에 그쳤다. 불법 브로커 행위에 대한 처벌이 '솜방망이'나 다름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책자금 불법 브로커는 시간이 흐르수록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불법 브로커 홍보물을 받아 본 경험을 가진 중소기업 사장이나 소상공인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정도다. 심지어 하루 수건의 홍보 메일을 받아 본 경험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다. 서울 서초구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장희진 씨(31·여·가명)는 "아침마다 메일함을 보면 흡사 정부기관 같은 사명의 민간기업이 보낸 정책자금 대행 홍보물이 몇 통씩 와 있다"며 "벌써 몇 년째 같은 홍보 메일을 보내며 정상 영업 중이라는 것은 이렇다 할 제재 없이 꾸준한 실적을 내고 있다는 의미 아니겠나"라고 반문했다.
정책자금 불법 브로커에 대한 허술한 감시와 제재는 과거 해당 업무 종사자의 증언을 통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났다. 그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5년 간 정책자금 대행업체에서 근무했고 무려 50건을 성사시켰다고 밝혔다. 심지어 정책자금 허들을 통과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대표자를 변경하거나 기존에 없던 사업 내용을 추가하는 편법 행위까지 저질렀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그는 정책자금 브로커들이 판치는 이유에 대해 정책 운영기관이나 자금집행 기관 등에서 불법 중계 행위를 근절하겠다고 엄포를 놓지만 실질적인 단속이나 조사는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못 박았다. 말 뿐인 제재·단속이 중소기업·소상공인을 불법의 늪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최근 정부가 정책자금 불법 중계를 근절하기 위해 '신고 포상제' 카드를 꺼냈지만 이를 두고도 실효성을 문제 삼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정책자금 신청자들 대부분이 자금사정이 어려워 급전 또는 투자금이 절실함에도 정책지원을 받는 방법을 아예 모르거나 스스로 신청 노하우가 부족하다고 판단한 이들이라는 이유에서다. 과거 정책자금 대행업체에 근무했던 L씨는 "정책자금 대행 신청자들을 만나보면 어떻게든 정책자금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심지어 정책자금 지원을 많이 받게 해주면 수수료를 더 준다는 사람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만큼 상황이 간절하단 소리린데 그들 중 과연 누가 정책자금 신청을 미루고 신고부터 하겠나"라고 덧붙였다.
"업체 맡겨야 정부 문턱 넘는다" 불필요한 의심 사는 정책자금 수혜기업 선정 작업
주목되는 사실은 정책자금 지원과 관련한 부실한 관리·감독의 부작용 수위가 상당하다는 점이다. 다수의 전문가들에 따르면 경제적 약자나 투자가 절실한 유망기업일지라도 정책자금 지원 우선순위에서 전문 대행업체를 앞세운 기업에 밀릴 가능성이 높다. 여러 건의 자금 지원을 성사시킨 경험을 가진 전문 대행업체들은 저마다의 선정 노하우를 지니고 있어서다. 만약 우수한 경쟁력을 지닌 유망기업이 한정된 재정 요건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려 최악의 경우 파산이라도 하게 된다면 결국 국가적 손실로 이어지게 된다. 정부가 각종 꼼수를 활용한 정책자금 불법 중계를 근절하려는 결정적 이유다.
정책자금 지원 정책, 나아가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감 형성도 예상되는 부작용 중 하나다. 정책자금 지원이 꼭 필요한 상황임에도 제 때 지원받지 못할 경우 누구나 정부 정책의 실효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몇몇 업체의 경우 정책자금 중계를 통해 지원을 받은 이른바 '성공 사례'를 마케팅 수단으로 삼고 있어 상대적 발탈감에 따른 정책 불신은 더욱 커질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정책자금 브로커에 대한 신뢰는 더욱 커지는 역효과까지 생겨나게 된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과 교수는 "본래 정책자금은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의 생존과 성장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인데 일부 브로커들이 기업들의 긴박한 자금 상황을 악용하면서 제도의 취지가 훼손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더욱 큰 문제는 적발 사례가 있어도 실질적 제재가 미흡하다는 점이다"며 "정부는 불법 브로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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