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만 더봄] K-팝 100년을 향한 첫걸음···조선인 최초로 음반을 출시한 가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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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만 더봄] K-팝 100년을 향한 첫걸음···조선인 최초로 음반을 출시한 가수는?

여성경제신문 2026-01-02 13:00:00 신고

오늘날 우리는 버튼 하나, 손짓 하나로 음악을 듣는 시대에 살고 있다. 참 편리한 세상이다. 그러나 음악이 언제나 이렇게 쉽게 다시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때 노래는 불리는 순간에만 존재했고, 다시 감상하려면 연주자와 가수가 또 한 번 무대에 올라야만 했다. 음악은 철저히 ‘시간의 예술’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인간은 오래전부터 노래를 소유하고 싶어 했다. 유리관 안에서 노래를 부른 뒤 뚜껑을 닫아 다시 들어보려 하기도 했고, 한겨울 동굴 깊숙한 곳에서 노래를 부른 뒤 봄이 되면 소리가 녹아 흘러나오기를 기대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시도들이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었던 간절함만큼은 진지했을 것이다.

이 오랜 갈증은 1877년, 토머스 에디슨에 의해 비로소 해소된다. 에디슨은 은박지를 감은 원통형 음반, 이른바 Tinfoil을 통해 소리를 저장하고 재생하는 데 성공한다. 미세한 바늘이 소리의 진동을 따라 은박지에 흔적을 남기고, 이를 다시 돌려 소리를 재현하는 방식이었다. 지금의 디지털 음원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인간이 소리를 ‘소유’한 최초의 순간이었다. 

토머스 에디슨이 발명한 세계 최초의 녹음기 Tinfoil /사진=김성만 
토머스 에디슨이 발명한 세계 최초의 녹음기 Tinfoil /사진=김성만 

그래서 세계 최초의 음반을 남긴 인물은 가수가 아닌 발명가였다. 당시 에디슨이 녹음한 노래는 동요 이었다. 음악의 역사를 연 첫 음반이 동요였다는 사실도, 어쩐지 의미심장하다.

이 변화는 곧 음악의 운명을 바꾸었다. 노래는 더 이상 흘러가 버리는 예술이 아니라, 기록되고 반복되는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 음반 산업과 대중음악 문화의 출발점은 바로 이 지점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1900년 이전의 조선시대는 어땠을까. 당시에도 음악은 풍부했다. 판소리와 민요, 산조 같은 기악 음악, 궁중음악과 풍류방의 노래들이 각 계층과 취향에 따라 사람들 곁에 있었다. 다만 이 음악들은 악보나 음반이 아닌,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했다.

정간보라는 훌륭한 악보 체계가 있었지만, 일반 대중이 접하기는 어려운 시대였다. 명창이 늙고 세상을 떠나면 노래 역시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기준으로 말하면, 저장 장치가 없는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 낯선 기계 하나가 들어온다. 미 공사관을 통해 소개된 유성기였다. 소리가 통 속에 담겨 다시 나온다는 사실은 신기함을 넘어 거의 마술에 가까웠다. 처음에는 외국 문물에 대한 호기심이었지만, 이내 질문이 뒤따랐다.

“이 기계에 우리 노래를 담을 수는 없을까?”

그 질문에 응답하듯, 1907년 무렵 미국 시카고에서 한국 최초의 음반을 남긴 인물이 등장한다. 박춘제 명창이다. 당시 조선 최고의 명창이었던 그는 6명의 기생과 함께 한 달 넘는 항해 끝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여기서 남긴 음반이 판소리 “적벽가”였다.  

고국으로 돌아온 뒤,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그 소리를 들은 고종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춘재야, 너의 명이 10년은 줄었겠구나.”

유성기에 혼이 빨려 들어갔다는 뜻이다. 그만큼 낯설고도 강렬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자신의 노래를 음반으로 만든 박춘재 명창 /사진=김성만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자신의 노래를 음반으로 만든 박춘재 명창 /사진=김성만 

이 음반은 흔히 한국 최초의 음반 시도로 불린다. 물론 제작 과정 전반은 미국의 기술에 의존했지만, 그 의미는 단순한 ‘최초’에 있지 않다. 이 순간부터 노래는 특정 공간과 시간에 묶이지 않게 된다. 명창의 소리는 한 번 더, 또 한 번 더 재생될 수 있었고, 개인의 예술은 사회의 자산이 되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면, 이왕 녹음할 거라면 춘향가나 심청가가 아니라, 왜 하필 중국 고전소설 <삼국지연의> 의 적벽대전을 노래한 판소리였을까 하는 점이다. 하지만 이 또한 당시 시대와 취향이 반영된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 시도를 계기로 판소리는 무대 위의 공연에서 음반이라는 매체를 통해 대중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오늘날 저작권법에서 음반 재생을 ‘공연보상료’로 간주하는 이유도 복제된 음원이 가수를 대신해 노래를 부른다는 개념에서 비롯되었다.

아직 ‘대중가수’라는 말도, 음악 차트나 방송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이 한 장의 음반은 분명한 신호였다. 음악이 이제 사람을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이제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떠오른다. 음반에 담긴 노래는 과연 누구를 향해 불리기 시작했을까. 그리고 언제부터 노래는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시대의 마음을 대신 말하게 되었을까.

조선 후기 유성기 재현 모습 /사진=김성만 
조선 후기 유성기 재현 모습 /사진=김성만 

다음 연재에서는 1910~1920년대로 들어가 보려 한다.

내가 왜 K-팝의 역사를 100년이라 말하는지, 그 이유 역시 이 시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노래가 처음으로 대중의 의미를 얻기 시작한 순간을 따라가 보려 한다. 그때부터 음악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한 시대를 기록하고 세상에 말을 거는 가장 대중적인 언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성경제신문 김성만 음악프로듀서 · 공연기획자 musicman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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