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낡고 허름한 집 한 채에서 시작되는 연극 ‘오펀스’는 관계의 가장 낮은 지점을 응시하는 작품이다. 혈연도 제도도 보호하지 못한 공간에서 인물들은 서로에게 가장 솔직한 얼굴을 내보인다. 3년 만에 돌아온 네 번째 시즌의 ‘오펀스’는 이 집요한 시선을 다시 무대 위로 불러온다.
‘오펀스’는 사건보다 인물의 감정으로 기억된다. 고아 형제 트릿과 필립, 그리고 한때 고아였던 갱스터 해롤드가 만들어내는 동거는 불안과 온기가 동시에 흐르는 세계다. 이들의 관계는 안정적이지 않지만, 불완전함 속에서 인간적인 진실이 드러난다.
형 트릿은 거칠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세상과 맞선다. 그의 행동은 보호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만, 그 안에는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깊게 자리한다. 사랑과 통제가 구분되지 않는 지점에서 트릿의 내면은 점점 균열을 드러낸다.
필립은 형의 과도한 보호 속에 갇힌 채 성장의 시간을 유예당한 인물이다. 밖으로 나가면 죽는다는 믿음 아래 살아가지만, 그는 몰래 단어를 익히고 세상을 상상하며 조용히 변화의 씨앗을 키운다. 이 은밀한 배움은 작품 전반에 흐르는 희미하지만 단단한 빛이다.
해롤드는 납치된 인질이라는 설정과 달리 가장 어른다운 시선을 지닌 인물이다. 폭력의 세계를 통과해 온 그는 형제의 불안과 결핍을 단번에 꿰뚫는다. 그의 존재는 이 집 안에 균형과 온기를 동시에 불러온다.
이번 시즌의 12인 캐스팅은 ‘오펀스’의 감정 스펙트럼을 더욱 넓힌다. 해롤드 역의 박지일, 우현주, 이석준, 양소민은 각기 다른 무게와 온도로 인물을 완성한다. 특히 초연부터 함께해 온 박지일은 시간의 축적이 만들어낸 깊이로 작품의 중심을 단단히 잡아준다.
트릿 역의 정인지, 문근영, 최석진, 오승훈은 불안한 청춘의 다양한 얼굴을 무대 위에 펼쳐낸다. 그중 문근영의 연극 무대 복귀는 이 인물의 내면을 새로운 결로 드러내며, 인물의 파괴성과 연약함을 동시에 부각시킨다.
필립 역의 김시유, 김주연, 최정우, 김단이는 성장의 서사를 섬세하게 이어간다. 젠더 프리 캐스팅으로 구현되는 필립의 얼굴들은 보호받는 존재에서 스스로 선택하는 존재로 이동하는 과정을 다층적으로 보여준다.
‘오펀스’가 여러 시즌을 거치며 반복해서 사랑받아온 이유는 감정을 과장하지 않는 태도에 있다. 작품은 눈물을 강요하지 않고, 관계의 모순과 상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관객의 선택으로 수상한 기록들은 이 연극이 경험으로서 깊이 각인되었음을 말해준다.
초연부터 함께해 온 김태형 연출은 작품의 방향을 흔들림 없이 이끈다. 인물의 감정을 정제된 호흡으로 따라가며,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의미를 갖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그의 연출은 ‘오펀스’를 서사의 나열이 아닌 감정의 체험으로 완성한다.
결국 ‘오펀스’는 고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록이다. 보호와 상처가 뒤섞인 관계 속에서 인물들은 서서히 변화하고 성장한다. 이 낡은 집에서 태어나는 감정의 움직임은 시대를 건너 다시 관객에게 닿는다.
2026년 봄, 대학로 TOM 1관에서 다시 열리는 ‘오펀스’는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무대를 채울 예정이다. 세대와 성별을 넘어 축적된 감정의 서사는 이번 시즌에도 묵직한 여운을 남길 것이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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