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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만난 김현수(56) 씨의 장바구니에 담긴 건 컵라면과 음료수, 롤 화장지였다. 과거에는 특정 날짜에 줄을 서서 정해진 물품만 받았지만 온기창고가 들어선 이후 필요한 물건을 직접 고를 수 있게 됐다.
서울시는 매달 동행카드에 포인트를 충전해 주고 주민들은 이를 이용해 물품을 산다. 주당 2만 포인트씩 제공되는 이 시스템은 주민들에게 선택권과 자존감을 선물하고 있다.
◇‘잔소리’가 바꾼 인생, 사람으로 버티는 겨울
김씨를 따라 들어선 1평 남짓한 방은 손등이 아릴 정도로 한기가 가득했다. 이곳은 1930년대 지어진 노후 주택으로 단열이 거의 되지 않는다. 10년 전 도시가스가 들어섰지만 쪽방 주민들은 여전히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다. 배선시설도 낡다 보니 전열기구 사용 시 화재 위험이 커 사용조차 제한적이다.
김씨가 한파를 견딜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은 비단 후원 물품뿐만이 아니다. 한때 주방 요리사였다는 그는 스트레스로 알코올 중독에 빠져 삶의 의지를 잃었었다. 그런 그를 일으켜 세운 건 상담소 복지사들의 끈질긴 ‘잔소리’였다. 그는 “술 먹는 곳마다 쫓아다니며 잔소리하던 복지사가 처음에는 참 미웠다”면서 “그 잔소리 덕에 금주한 지 2년이나 됐다. 금주를 하고 나니 복지사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라고 했다.
단순히 물품 지원을 넘어 ‘누군가 나를 살피고 있다’는 따뜻함이 쪽방촌 주민들로 하여금 겨울을 버티게 하는 실질적인 동력이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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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 배선 틈새 메운 AI… 안전 사각지대 해소
길목에서 만난 또 다른 쪽방촌 주민 홍성환(73) 씨는 한 달 기초생활수급비 105만원 중 30만원을 월세로 내고 있다. 수중에 남은 75만원으로 한 달을 버티기에는 치솟은 물가가 야속하기만 하다. 홍씨는 “예전엔 난방비 걱정으로 집 안에서도 솜 점퍼를 입고 버텼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정부의 에너지바우처 지원이 강화되며 변화가 시작됐다. 1인 세대 기준 연간 29만 5200원까지 지원되는 바우처 덕에 홍씨는 이제 난방비를 아끼려 떨지 않아도 된다. 그는 “바우처 덕에 가스비 부담이 줄었다”며 “상담소에서 지급하는 부식과 목욕탕 이용권까지 더해져 전보다 버틸 만하다”며 웃어 보였다.
돈의동 쪽방촌에는 현재 493명의 주민(11월 말 기준)이 거주 중이다. 다닥다닥 붙은 낡은 건물 구조 탓에 겨울철 추위보다 무서운 것은 화재다. 실제 서울시 통계에 따르면 쪽방촌 화재의 50.9%가 노후 전력선 과부하 등 전기적 원인으로 발생한다.
이런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서울시는 지난해부터 쪽방촌 집집마다 ‘IOT 스마트 전기화재 예방 시스템’을 도입했다.
최영민 돈의동 쪽방상담소장은 “전류가 비정상적으로 튀거나 과부하가 걸리면 즉시 직원들에게 알림이 오기 때문에 사전에 위험을 확인하고 조치할 수 있다”고 했다.
지방자치단체도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 종로구청은 내년 3월까지 비상근무 체제를 가동하며 주·야간으로 쪽방 지역을 순찰한다. 건강이 극도로 취약한 주민 42명은 ‘특별보호대상자’로 선정해 간호사가 매일 방문한다. 지난달에는 한국전기·가스안전공사와 함께 전기시설 139개소와 가스시설 7개소의 정비도 마쳤다.
하지만 행정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 소장은 “세금인 주거급여가 사실상 임대 수익으로 이어지지만 정작 건물주는 노후 설비 개선에 소극적”이라며 “결국 위험한 건물을 다시 세금으로 보수해 주는 구조적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고 말했다.
취재를 마치고 나오는 길, 영하의 기온 속에서도 주민들과 복지사들이 서로의 안부를 묻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100년 가까운 세월을 버틴 낡은 벽들 사이로 첨단 기술과 사람의 온기가 더해져 또 한 번의 매서운 겨울을 이겨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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