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젊기만 한 도시, 늙어가는 인간

실시간 키워드

2022.08.01 00:00 기준

[목멱칼럼]젊기만 한 도시, 늙어가는 인간

이데일리 2025-12-31 05:00:00 신고

3줄요약
[최희정 웰에이징연구소 대표] 초고령사회에 도시는 어떻게 다시 설계해야 하는가.



한국은 이미 2025년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1000만 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우리의 도시는 여전히 젊은 사람의 속도에 맞춰 설계되고 있다. 계단과 비탈길이 많은 주거지, 엘리베이터가 없는 노후 아파트, 자동차 이용을 전제로 한 도심 구조는 나이가 들수록 이동을 제한하고 결국 노년의 삶을 집 안에 가둬 버린다.

이러한 상황은 단순한 인식이 아니라 한국의 도시 구조가 지닌 현실이다. 서울·부산·대구 등 주요 도시는 산지 지형을 따라 형성됐고 노후 주택 비율이 높아 엘리베이터가 없는 저층 공동주택이 여전히 많다. 자동차 중심의 도시계획이 이어지면서 도보 접근성과 보행 안전은 충분히 확보되지 못했고 가파른 경사와 계단은 노년층의 외출을 어렵게 한다. 한국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2024년 보행 중 사망자는 전년 대비 3.8% 증가한 920명으로 집계됐으며 이 중 절반 이상이 65세 이상 고령층이었다. 즉, 도시의 노후성과 지형적 조건, 이동체계의 한계는 노인의 일상적 이동과 사회적 관계를 좁히는 구조적 요인이 되고 있다.

초고령사회는 단지 인구가 늙어가는 현상이 아니다. 이제 핵심 질문은 ‘노년의 삶은 과연 어떤 공간과 조건에서 지속되는가’로 옮겨 가야 한다. 우리에게 놓인 과제는 수명 연장이 아니다. 익숙한 동네에서 존엄을 지키며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다.

그동안 노화는 개인과 가족, 혹은 요양시설의 책임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실제 노년의 삶은 병원이나 시설보다 집과 동네에서 이뤄진다. 가까운 병원과 약국, 걸어갈 수 있는 시장과 카페, 관계를 이어가는 교회와 동네 모임이 노인의 일상을 지탱한다. 따라서 노화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 공간의 문제다. 결국 ‘돌봄’은 특정 기관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아니라 일상을 담는 도시라는 그릇에서 시작된다.

일본은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지 20년이 넘었다. 다만 일본의 모델을 그대로 답안지처럼 따라할 수는 없다. 한국은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더 짧은 시간 안에 큰 변화를 수용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의 성과와 시행착오는 우리가 미리 대비해야 할 미래의 거울에 가깝다. 지금 도시의 늙음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의료·돌봄·관계의 부담이 개인과 가족에게 더 크게 전가될 것이다.

초고령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도시가 갖춰야 할 조건은 세 가지다.

첫째, 근린 기반 서비스가 가능해야 한다. 일본의 지역포괄케어 시스템은 일상생활권을 ‘대략 30분 이내에 필요한 의료·돌봄·생활지원이 닿는 범위’로 설정하고 있다. 일부 지자체는 이를 더 세분화해 반경 500m(약 15분 보행) 안에서 일상 서비스를 연결하는 모델을 운영한다. 핵심은 서비스 수가 아니라 ‘실제로 갈 수 있는가’, ‘닿을 수 있는가’다. 집에서 15분 이내에 병원·약국·식료품점이 있고 걸어서 이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노인은 지역에서 살아갈 수 있다.

둘째, 이동권 확보는 노년의 존엄을 지키는 토대다. 나이가 들면 이동 능력이 저하하고 이는 활동 축소와 고립으로 이어진다. 보행환경 개선, 대중교통 접근성 강화, 저상버스 확대, 보조 이동수단의 제도적 허용 등이 필요하다. 이동은 단순히 장소를 옮기는 행위가 아니라 사회와 관계를 잇는 통로다.

셋째, 머무를 수 있는 열린 장소가 필요하다. 노인에게 가장 큰 결핍은 시설이 아니라 사람이며 관계를 맺을 공간이 사라진다는 데 있다. 작은 도서관, 동네 카페와 식당, 공원처럼 세대가 자연스럽게 섞이고 머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관계는 공간 속에서 형성되며 머물 곳이 있을 때 노인은 지역의 구성원으로 남는다.

이 세 가지 조건은 일본의 일부 지역에서 실천적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일본의 가나가와현 ‘후지사와 스마트타운’은 주거·의료·커뮤니티·상점을 보행권 안에 배치해 노인이 익숙한 환경에서 관계와 일상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것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지만 ‘동네가 곧 돌봄 인프라가 된다’는 관점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한국의 현실은 여전히 시설 중심이다. 병원·요양·주거·지자체 서비스는 제각각 작동하고 개인이 이를 스스로 연결해야 한다. 이러한 단절은 노년의 삶을 불필요한 시설 입소·장기 입원으로 내몰고 삶의 연속성을 해친다. 초고령사회에서 핵심 과제는 서비스 공급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삶이 머무는 공간을 통합적으로 설계하는 일이다.

도시가 늙는다는 것은 사람의 변화를 인정하고 그들이 살아갈 구조를 다시 짓는 일이다. 걷기 쉬운 길, 접근 가능한 의료, 머무를 수 있는 장소, 관계를 이어갈 작은 공간. 이 네 가지가 촘촘히 이어질 때 노인은 고립되지 않고 삶의 주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결국 도시의 늙음에 적응한다는 것은 늙어가는 인간을 존엄하게 대우하는 사회의 약속이다.

Copyright ⓒ 이데일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실시간 키워드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0000.00.00 00:00 기준

이 시각 주요뉴스

알림 문구가 한줄로 들어가는 영역입니다

신고하기

작성 아이디가 들어갑니다

내용 내용이 최대 두 줄로 노출됩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이 이야기를
공유하세요

이 콘텐츠를 공유하세요.

콘텐츠 공유하고 수익 받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유튜브로 이동하여 공유해 주세요.
유튜브 활용 방법 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