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N유산] 은입사 선 위에 흐르는 물과 시간, 그리고 불교 공예의 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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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N유산] 은입사 선 위에 흐르는 물과 시간, 그리고 불교 공예의 정수

뉴스컬처 2025-12-30 14:28:2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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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청동 은입사 물가풍경무늬 정병'은 고려 불교미술이 도달한 정신적·기술적 정점을 한 몸에 담은 기물이다. 정병이라는 이름처럼 기능은 단순하다. 맑은 물을 담는 병. 그러나 고려인은 소박한 그릇에 세계관과 미의식, 그리고 불교적 이상을 응축시켰다. 이 유물은 물을 담기 위한 용기이기 이전에, 물을 매개로 한 수행과 공양의 상징이었다.

정병은 본래 승려가 지녀야 할 열여덟 가지 필수 물건 가운데 하나로, 수행자의 청정함을 상징한다. 시간이 흐르며 개인의 소지품에서 불전에 바치는 공양구로 성격이 변화했지만, 그 의미는 오히려 확장되었다. 불교 의식 중 쇄수게를 행할 때, 감로수를 뿌려 번뇌와 마귀를 씻어내는 도구로 쓰였다는 점에서, 이 병은 단순한 용기를 넘어 의례의 핵심적 매개체였다.

청동 은입사 물가풍경무늬 정병.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청동 은입사 물가풍경무늬 정병. 사진=국립중앙박물관

고려시대 정병의 전형적 형식은 이 유물에서도 잘 드러난다. 계란형의 풍만한 몸체, 길고 매끈하게 뻗은 목, 그 위에 놓인 둥근 테와 대롱 모양의 첨대는 기능성과 조형미를 동시에 충족한다. 한쪽에 달린 귀때는 비녀처럼 섬세하게 잘록해, 물을 따르기 위한 실용적 장치이면서도 전체 균형을 해치지 않는 장식적 요소로 작동한다. 고려 장인들이 얼마나 구조와 미감을 동시에 고려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국보의 반열에 올려놓는 결정적 이유는 표면을 채운 은입사 장식에 있다. 물가의 풍경을 병의 몸체 전체에 펼쳐 놓은 구성은, 공예품을 회화적 서사로 끌어올린 고려 미술의 독창성을 웅변한다. 언덕 위로 길게 늘어진 버드나무는 바람에 흔들리는 듯하고, 물 위에서는 어부가 노를 저으며 고기를 낚는다. 정적인 금속 표면 위에 시간과 움직임이 스며든다.

이러한 풍경은 불교에서 물은 깨달음과 자비, 그리고 윤회의 흐름을 상징한다. 물가의 삶을 담아낸 장면은 인간과 자연, 수행과 일상이 분리되지 않는 세계를 암시한다. 수행자가 손에 들었을 정병에 새겨진 풍경은, 곧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자 마음의 경지였을 것이다.

기법적으로도 고려 금속공예의 높은 수준을 증명한다. 은입사는 표면에 미세한 홈을 판 뒤 은선을 두드려 박는 고난도의 기술로, 단순한 장식 이상의 집중력과 숙련을 요구한다. 긴 목에 새겨진 구름무늬, 어깨와 굽 주변의 여의두무늬, 귀때의 풀무늬는 각기 다른 상징과 리듬을 지니며, 전체 문양을 조화롭게 엮는다.

특히 여의두무늬는 불교적 길상과 소망의 성취를 의미하는 상징으로, 정병이라는 공양구의 성격과 정확히 맞물린다. 구름무늬는 하늘과 불국토를 암시하고, 풀무늬는 생명의 끈질긴 생동을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문양 하나하나가 의미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 읽을 수 있는 공예품이라 할 만하다.

현재 병의 몸체는 파랗게 녹슬어 있지만, 오히려 그 산화된 표면은 은입사의 밝은 선들과 대비를 이루며 독특한 미감을 형성한다. 시간의 흔적이 훼손이 아니라 미의 일부로 작용하는 순간이다. 고려 장인들이 의도했을 색채는 아니었을지라도, 오늘날의 관람자는 이 변화 속에서 유물의 생애와 시간을 함께 마주하게 된다.

청동제 병에 은입사를 한 사례는 고려에 적지 않게 남아 있으며, 고려청자의 상감기법과도 깊은 관련을 맺는다. 금속과 도자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술과 미의식은 고려 공예 전반의 실험성과 개방성을 보여준다. 물성을 달리하는 재료 위에 동일한 미적 원리를 적용할 수 있었던 것은, 기술 전수가 아니라 개념의 공유가 있었음을 뜻한다.

이 정병은 고려 불교미술이 추구한 이상이 얼마나 일상적 사물 속에 스며들어 있었는지를 잘 말해준다. 거창한 불상이나 탑이 아니라, 물을 담는 병 하나에 우주와 수행의 세계를 담아낸 것이다. 이는 신앙이 삶과 분리되지 않았던 시대의 풍경이기도 하다.

국보로 지정된 이유는 단지 뛰어난 공예품이어서가 아니라, 고려 사회의 정신사와 미술사, 기술사를 함께 증언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불교 의례, 자연관, 장인정신이 교차하는 지점에 이 정병은 서 있다. 작은 입지름과 달리,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실로 깊고 넓다.

현재 박물관 전시장에 놓인 이 정병은 하나의 유물을 넘어 고려인의 정신세계와 미의식을 전하는 역사적 증언물로 기능하고 있다. 그 안에는 맑은 물에 마음을 씻고자 했던 고려인의 신앙,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 했던 삶의 태도, 그리고 이를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형상화한 장인의 사유가 겹겹이 스며 있다. '청동 은입사 물가풍경무늬 정병'은 시간을 건너와, 침묵 속에서 여전히 고려의 세계관과 미의식을 또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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