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최병일 칼럼니스트]
미드타운 5번가에 있는 유서 깊은 호텔 뉴욕플라자는 객실 230개를 갖춘 뉴욕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나홀로 집에2’의 촬영 장소로도 유명하고 비틀스와 마크 트웨인 등 유명 인사들이 애용했던 호텔이기도 하다.
뉴욕플라자는 한편으로 세계 경제의 흐름을 바꾼 중요한 협정이 이뤄진 장소이기도 하다.
1985년 9월 22일, 뉴욕 플라자 호텔에 고급 의전용 리무진 차량이 줄지어 도열했다. 미국, 일본, 서독, 프랑스, 영국 등 G5국가의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미국 재무장관 제임스 베이커(James Baker)의 주재로 진행된 협상은 시작부터 분위기가 싸늘했다. 말이 협상이지 미국의 압박은 우격다짐과 협박의 중간쯤 되는 수준이었다.
미국 측은 일본 통화가치의 절상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미국이 일본 물건을 계속 사주는데 일본은 미국 물건도 안 사주고 수출만해서 경상수지 악화가 심각하다는 것이 회담의 요지였다. 일본 측 재무대신과 일본은행 총재는 난감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딱히 반박할 수도 없었다.
협상당시 미국경제는 재정적자에 무역적자가 더해진 이른바 ‘쌍둥이 적자’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일본의 GNP(1인당 국민소득)는 이미 미국을 추월한 지 오래였다.
미국 경제의 그늘이 짙어진 시작점은 1970년대 석유파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3년 10월 16일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매월 원유생산을 전월 대비 5%씩 감소하겠다고 발표한다. 1차 석유파동의 시작이었다. 이어 1978년엔 이란 내 이슬람 혁명을 계기로 OPEC이 다시 유가를 올리면서 2차 석유파동이 일어났다. 1973년 석유 파동 전 배럴당 3달러2센트였던 유가는 1978년 이란이 석유생산을 감축하고, 사우디아라비아마저 감축에 들어가자 배럴당 40달러까지 뛰었다.
두 차례의 오일 쇼크는 전세계적인 경제불황을 불러왔다. 원유값 상승으로 대부분의 물가가 오르는데 실업마저 덩달아 심각해지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등장한 것이다. 이 파고를 최강대국인 미국도 피해갈 수 없었다. 1970년부터 1981년 사이 미국의 소비자물가가 한해 15%까지 뛰고 실업률이 9%에 달하기도 했다.
해결책을 고민하던 미국은 경상수지 악화를 해결하기 위해 다소 강압적인 선택을 했다. 일본과 서독을 표적삼아 통화가치를 절상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자국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면 수출 경쟁에서 유리해진다. 미국의 노림수는 엔화와 마르크화의 절상, 즉 달러 절하를 통해서 무역적자를 줄이는 것이었다. 미국의 강력한 압박에 일본은 버티지 못했고, 미국 재무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성공적인 회담이었다고 자평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플라자 합의’(Plaza Accord)다.
독일 마르크화는 1주 만에 달러화에 대해 약 7% 엔화는 8.3% 각각 오르는 즉각적인 변화가 나타났고 이후 2년 동안 달러 가치는 30% 이상 급락했다. 덕분에 미국제조업체들은 달러 약세로 높아진 가격경쟁력을 바탕으로 해외시장에서 승승장구 했으며 미국경제는 회복세로 들어섰다.
뉴스컬처 최병일 newsculture@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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