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데일리포스트=김정은 기자ㅣ벌이 빛이 깜빡이는 '시간의 길이'를 구별해 학습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짧게 켜진 빛과 길게 켜진 빛을 구분해, 보상이 연결된 쪽을 선택했다. 곤충이 시간 정보를 인식하고 이를 행동 결정에 활용할 수 있음을 실험으로 확인한 첫 사례다.
영국 퀸 메리 런던대학교 연구팀은 호박벌(Bombus terrestris)을 대상으로 빛의 지속시간을 구별하는 능력을 조사했다. 빛의 색이나 형태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켜져 있었는지를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 연구팀은 이를 '빛의 길이를 읽는다'고 표현했다.
그동안 짧고 긴 신호를 구분하는 능력은 사람과 영장류, 비둘기 같은 일부 척추동물에서만 보고돼 왔다. 모스 부호처럼 신호의 길이를 정보로 해석하는 능력은 복잡한 뇌를 가진 동물의 전유물로 여겨져 왔다.
연구 결과는 영국 왕립학회가 발행하는 국제학술지 'Biology Letters'에 게재됐다.
◆ 벌, 빛의 길이를 보상과 연결했다
연구팀은 벌이 공간이나 모양이 아니라 빛이 켜져 있는 시간 자체를 단서로 삼도록 여러 구획으로 나뉜 미로형 실험 장치를 설계했다. 벌은 벌통에서 출발해 실험 구역으로 이동했고, 화면에는 두 개의 노란 원이 제시됐다. 두 원은 형태와 색은 같았지만, 빛이 유지되는 시간만 달랐다.
벌이 특정 길이의 빛을 선택하면 설탕 용액을 얻을 수 있었고, 다른 길이의 빛을 고르면 쓴맛이 나는 키니네 용액을 마주했다. 어떤 빛의 길이가 보상과 연결되는지는 개체마다 달랐지만, 훈련이 반복되자 대부분의 벌은 보상이 주어지는 빛의 지속시간을 정확히 구별해 선택했다.
신호의 위치는 매번 무작위로 바뀌었다. 벌이 특정 장소를 기억한 것이 아니라, 빛의 지속시간 자체를 기준으로 판단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 '양'이 아닌 '지속시간'을 기억
연구팀은 벌이 단순히 빛의 총량이나 점멸 횟수를 단서로 삼았을 가능성도 점검했다. 이를 배제하기 위해 점멸 횟수와 주기를 달리한 추가 실험을 진행했다. 그 결과 조건이 달라져도 학습 효과는 유지됐다.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시험 상황에서도 벌은 이전에 설탕과 연결됐던 빛의 길이를 선택했다. 연구팀은 이를 단순한 조건 반사가 아니라, 짧은 시간 정보를 기억해 이를 바탕으로 선택한 결과로 해석했다.
흥미로운 점은 호박벌이 자연환경에서는 이런 형태의 깜빡이는 빛 신호를 거의 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연구팀은 이 능력이 새롭게 진화한 기능이라기보다, 이미 갖고 있던 시간 처리 능력이 다른 과제에 응용된 결과일 가능성에 주목했다.
연구를 이끈 알렉산더 데이비드슨(Alexander Davidson) 연구원은 "벌이 서로 다른 점멸 시간을 학습하는 모습을 직접 확인한 것은 인상적이었다"며 "작은 뇌를 가진 곤충도 수초 단위의 시간 정보를 처리하고 이를 행동에 활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는 곤충의 시간 인식이 하루 주기의 생체리듬에 국한된다는 기존 인식을 넘어선다. 곤충 신경계가 짧은 시간 정보를 정밀하게 처리해 실제 행동 선택에 활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Copyright ⓒ 데일리 포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