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 소비는 줄었는데도 통화 유통량은 줄어들지 않았다. 대비 자산으로 쓰임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이 28일 발표한 ‘2025년 경제주체별 화폐사용현황 종합 조사 결과’는 한국 경제에서 현금의 역할이 결제 수단에서 대비 자산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개인 월평균 현금지출액은 32만4000원으로 2021년보다 36% 줄었다. 기업 역시 현금지출 규모가 크게 감소했다. 카드와 계좌이체, 간편결제 확산에 따라 일상적 거래에서 현금이 밀려난 결과다. 그러나 같은 기간 현금 보유 규모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개인의 평균 현금 보유액은 64만4000원으로 47.7% 늘었고, 기업의 현금 보유액은 977만8000원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이는 소비 위축이나 금융 불신의 신호와는 거리가 멀다. 현금을 덜 쓰게 된 만큼, 필요할 때를 대비해 남겨두는 구조로 이동했다는 의미다. 현금의 기능이 ‘지불수단’에서 ‘대기자산’으로 옮겨간 것이다.
계층별로 보면 이 변화의 성격은 더욱 분명해진다. 60대 이상 고령층과 월소득 100만원 미만 가구는 여전히 현금 사용 비중과 보유 규모가 상대적으로 높다. 이들은 비현금 결제 환경에서 불편을 가장 크게 느끼는 집단이다. 현금 없는 사회에 대한 반대 의견이 이 계층에서 뚜렷하게 나타난 이유다. 현금은 이들에게 편의가 아니라 접근성과 안전망에 가깝다.
정책의 방향성은 이 지점에서 효과를 드러냈다. 이재명 정부는 현금 사용을 제한하거나 퇴출하는 방식의 전환을 택하지 않았다. 비현금 결제 인프라는 확충하되, 현금 사용 선택권은 유지했다. 그 결과 현금 사용은 자연스럽게 줄었고, 취약계층의 금융 접근성도 함께 지켜졌다. 강요 없는 전환이었다.
기업도 같은 판단을 내렸다. 기업의 현금 보유 증가는 투자를 포기해서가 아니라 불확실성 관리의 성격이 강하다. 조사에서 기업들은 현금 보유 확대 이유로 ‘경영환경 불확실성 확대에 대비한 유동성 확보’를 가장 많이 꼽았다. 정책·금리·대외 환경이 정리될 때까지 버틸 수 있는 완충 장치를 쌓아둔 셈이다.
현금 없는 사회에 대한 여론도 이를 뒷받침한다. 현금 없는 사회에 반대하는 의견이 찬성보다 우세했지만, 동시에 현금 사용 선택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데에는 긍정적 인식이 확산됐다. 최근 1년간 현금 지급 거부를 경험한 비중도 오히려 줄었다. 전환 과정에서 마찰이 최소화됐다는 뜻이다.
한국은행은 이번 조사 결과에 대해 “비현금 지급수단 확산으로 일상적인 거래에서 현금 사용은 감소했지만, 금리 변화와 경제·경영 환경의 불확실성에 대비하려는 수요가 겹치면서 현금 보유 규모는 개인과 기업 모두에서 증가했다”며 “이는 현금이 결제 수단에서 벗어나 대비 자산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뉴스로드] 최지훈 기자 jhchoi@newsro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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