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박동선 기자] 2025년 K팝 씬(Scene)을 관통한 명제는 역설적이게도 "짧은 도파민과 긴 울림의 공존"이었다. 15초 숏폼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라지만, 대중은 그 찰나의 자극 뒤에 오는 공허함을 채워줄 '진짜 이야기'와 '진심 어린 목소리'를 갈구했다.
화려한 군무와 세계관으로 무장했던 K팝이 '힘'을 빼고 '결'을 살리기 시작한 한 해. 대중의 플레이리스트와 도파민을 동시에 점령하며 두 개의 곡선을 그렸던 2025년 K팝의 결정적 장면들을 복기한다.
◇ 듣는 음악의 귀환 : '마라맛' 가고 '청량' 어서오고…확장된 이지 리스닝
올해 차트의 가장 큰 특징은 '마라맛의 퇴조'와 '듣는 음악의 약진'이다. 강렬한 전자음과 난해한 세계관, 묘기 수준의 퍼포먼스에 피로감을 느낀 대중들이 다시 '멜로디'와 '가사'가 들리는 음악으로 회귀했다.
데이식스(DAY6)와 QWER이 불지핀 밴드 사운드의 유행은 K팝 특유의 '청량' 콘셉트와 맞물려 아이돌 음악 전반으로 확장됐다. 일상적인 소재와 편안한 사운드를 앞세운 보이넥스트도어(BOYNEXTDOOR)를 필두로, 올데이프로젝트, 코르티스 등의 활약은 '이지 리스닝'이 단순한 유행을 넘어 주류 문법으로 자리 잡았음을 증명했다.
이는 '청춘'과 '위로'라는 아날로그적 감성이 밴드뿐만 아니라 아이돌 그룹의 핵심 정서로도 깊숙이 파고들었음을 시사한다.
특히 우즈(WOODZ)의 'Drowning' 역주행은 이러한 흐름의 정점을 찍은 사건이다. 활동 공백기(군백기)와 상관없이, "노래가 좋으면 언젠가는 듣는다"는 불변의 진리를 차트 순위로 증명해 냈기 때문이다.
화려한 프로모션 없이 오직 곡의 힘과 가창력만으로 대중의 고막을 파고든 이 사례는, K팝이 '보여주는 음악'에서 다시 '듣는 음악'으로 본질을 찾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으로 남았다.
◇ 무대 찢고 나온 아이돌 : '케데헌'과 '다크 문', 무한 확장하는 K-유니버스
음악이 '소리'를 넘어 '이야기(Narrative)'로 확장된 해이기도 하다. 소니 픽처스 애니메이션과 넷플릭스가 내놓은 'K-Pop: Demon Hunters(케데헌)'의 글로벌 메가 히트가 대표적이다. K팝 걸그룹이라는 소재가 배경음악을 넘어 애니메이션의 핵심 서사이자 캐릭터로 기능하며, K팝이 하나의 '장르물(Genre)'로서 소비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러한 'IP 융합'은 전방위적으로 일어났다. 엔하이픈의 서사를 담은 하이브 오리지널 스토리 '다크 문' 시리즈는 웹툰을 넘어 애니메이션으로 확장되며 팬덤의 낙수효과를 입증했다.
이어 세븐틴이 글로벌 캐릭터 '스머프'와 손을 잡거나, 하츠투하츠가 '캐치! 티니핑' 시리즈와 협업한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K팝 아티스트가 국경과 세대를 초월한 '슈퍼 IP'와 대등하게 결합하며, 타깃 층을 기존 아이돌 팬덤에서 전 연령층으로 넓히는 '외연 확장'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 놀이가 된 K팝 : '밤양갱'에서 '아파트'로…한국적 '밈'의 정착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힙하다는 명제는 올해 비로소 완성형에 도달했다. 지난해 비비(BIBI)의 '밤양갱'이 한국적 디저트의 미감을 알리고, 진(BTS)의 '슈퍼 참치'가 한국 특유의 흥과 B급 정서를 전파했다면, 2025년 로제와 브루노 마스의 'APT.(아파트)'는 이 흐름을 거대한 '놀이 문화'로 정착시키는 방점을 찍었다.
이제 글로벌 대중은 K팝을 단순히 청취하는 것을 넘어, 한국의 술자리 게임을 따라 하고 한국어를 떼창하며 즐긴다. 이는 한국의 라이프스타일 자체가 하나의 밈(Meme)이자 놀이 도구(Playable Content)로 완전히 자리 잡았음을 의미한다. 음악의 완성도만큼이나 팬들이 직접 참여하고 놀 수 있는 판을 깔아주는 것이 흥행의 필수 공식이 된 셈이다.
◇ 왕들의 귀환과 성숙한 팬덤 : 클래스는 영원하고, 소비자는 똑똑하다
숏폼 시대의 휘발성 스타들 사이에서 '클래스'를 증명한 레전드들의 귀환도 빛났다. 7년 만에 돌아온 지드래곤(GD), 완전체로 뭉친 2NE1, 그리고 가왕 조용필까지. 이들은 유행을 쫓기보다 자신만의 '오리지널리티'로 세대를 통합하며 "명품은 유행을 타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보여줬다.
한편, 일 년 내내 이어진 하이브와 민희진 전 대표 간의 갈등 사태는 역설적으로 팬덤 문화의 성숙을 가져왔다. 팬들은 더 이상 기획사가 주는 대로 소비하는 수동적 존재에 머물지 않았다.
트럭 시위를 넘어 탄원서를 제출하고, 아티스트의 정서적 보호와 기업의 도덕성을 요구하며 직접 목소리를 냈다. 이는 K팝 팬덤이 단순한 '소비자'를 넘어, 시장의 감시자이자 '가치 소비'의 주체로 진화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화려한 포장지보다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한 2025년, 새로운 해의 K팝은 이 문화적 공명을 어떻게 더 깊고 넓게 퍼뜨릴지 고민하는 지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뉴스컬처 박동선 dspark@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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