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N유산] 눈은 길을 막고, 매화는 마음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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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N유산] 눈은 길을 막고, 매화는 마음을 부른다

뉴스컬처 2025-12-27 10:29:2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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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눈속에 매화를 찾아(雪中探梅圖)’는 조선 후기 문인화가 심사정의 예술 세계와 당대 사대부 정신을 응축해 보여주는 작품이다. 화면에 펼쳐진 겨울 산수는 계절 풍경의 재현을 넘어, 고결한 삶의 태도와 지식인의 내면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심사정(1707~1769)은 자 이숙, 호 현재로 불린 조선 후기 대표적 사대부 화가다. 그는 산수, 화조, 영모 등 다양한 화목을 넘나들며 폭넓은 화업을 펼쳤다. 기교의 과시보다 정신성과 필선의 리듬을 중시한 그의 태도는 조선 문인화의 흐름 속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형성한다.

심사정. ‘눈속에 매화를 찾아'.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심사정. ‘눈속에 매화를 찾아'.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작품의 서사적 기반은 당나라 시인 맹호연의 일화다.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한 맹호연은 조선 문인 사회에서 이상적 은자의 상징으로 수용되었다. 눈이 채 녹지 않은 파교를 건너 매화를 찾았다는 이야기는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고결함을 지키는 삶의 태도를 표상한다.

조선의 문인들은 이 고사를 통해 자신의 처지와 정신적 지향을 투영했다. 정치적 갈등이 격화되던 18세기 조선에서 은거와 자율적 고독은 현실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라 윤리적 선택으로 인식되었다. 심사정은 이 서사를 빌려 당대 문인의 공통된 정서를 화면에 정제해 담아냈다.

화면 중앙의 나귀 탄 맹호연과 동자는 주변 겨울 산수에 잠기듯 배치된다. 인물은 화면을 지배하지 않으며, 자연의 흐름과 여백이 주도권을 쥔다. 이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인식하는 문인적 세계관을 반영한다.

눈 덮인 언덕과 앙상한 나무, 적막한 공간은 겨울의 긴장을 축적한다. 소라껍질처럼 말려 올라간 언덕과 둥글게 솟은 산세는 심사정 만년 화풍의 전형으로, 유연한 곡선 위주의 구성은 내면적 풍경을 강화한다.

구불거리는 필선은 자연을 정태적 대상으로 고정하지 않고 살아 있는 흐름으로 인식하게 한다. 이는 실경의 사실성보다 사유의 깊이를 중시한 문인 산수의 방향성을 분명히 한다.

작품에서 매화는 화면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발견의 결과보다 찾아 나서는 과정이 강조되며, 이는 추구의 태도를 가치의 중심에 두는 문인적 윤리를 드러낸다.

눈은 모든 색을 덮어 풍경을 절제하지만, 매화의 존재를 예비하는 대비 장치로 기능한다. 혹한 속에서 피어나는 매화는 군자의 절개와 결부되며, 동아시아 문인 문화 전반에 공유된 상징 체계를 형성한다.

마(麻)를 바탕으로 한 재질 선택은 장식성을 배제하고 정신성을 부각한다. 이는 소박함과 자율성을 중시한 문인화의 미학을 재료 차원에서 구현한 결과다.

역사적으로 ‘눈속에 매화를 찾아(雪中探梅圖)’는 중국 고사를 조선적 맥락에서 재해석한 사례다. 수용과 변용을 통해 문화 전통을 자기화한 조선 문인의 역량을 보여준다.

정치적 발언을 직접화하지 않으면서도 윤리적 태도를 분명히 드러내는 점에서, 이 작품은 상징의 언어로 시대를 증언한다. 침묵의 설득력은 오히려 메시지를 공고히 한다.

미술사적으로 작품은 심사정 예술의 원숙기를 대표한다. 자유로운 필선과 여백의 운용은 조선 문인화의 성숙한 완성도를 보여준다.

오늘의 관점에서 작품은 성과 중심의 시간 감각과 다른 리듬을 제시한다. 눈 덮인 길을 건너는 행위는 즉각적 보상과 거리를 두며, 과정의 가치를 강조한다.

결국 ‘눈속에 매화를 찾아(雪中探梅圖)’는 자연·인간·정신이 하나의 리듬으로 결속된 세계를 제시한다. 느린 행렬의 지속 속에 조선 문인이 지켜온 가치와 예술의 지속성이 함께 담겨 있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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