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NEWS=이재훈 대표기자] 미래를 이끌 리더를 발굴하는 '스페셜리더' 코너에서 김두관 전 국회의원을 선정했다. 1958년 경남 남해의 작은 어촌 마을에서 태어나 마을 이장, 군수, 장관, 도지사, 국회의원을 거친 그의 삶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상징 그 자체다. 2025년 조기 대선에서 '개헌 대통령'을 기치로 진보 진영 첫 출마를 선언했던 그의 여정은 한국 정치의 다양성과 도전 정신을 상징한다.
▲마을 이장의 꿈, 정치의 씨앗이 되다
1958년 12월 3일,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 바다 바람이 세찬 작은 어촌 마을에서 김두관은 태어났다. 빈농의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바다를 바라보며 '이 마을을 바꾸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키웠다. 1977년 남해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국민대에 합격했으나 입학금이 없어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2년간 마늘 농사를 지으며 가계를 도운 그는 1979년 경북전문대학에 입학했고, 이후 동아대학교 정치외교학과로 편입해 1987년 졸업했다.
민주화 운동의 소용돌이 속에 있던 1986년, 그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에서 활동하다 신한민주당 개헌추진본부 충북지구 결성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는 시련을 겪었다.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민중의당 후보로 고향인 남해·하동에 출마했으나 5%도 채 되지 않는 득표율로 낙선했다. 그러나 이 실패가 그의 정치 인생의 진정한 출발점이 됐다. 같은 해 29세의 나이로 고향 이어리 마을 이장으로 선출된 것이다.
"민주주의는 마을에서 시작된다"는 신념으로 2년간 이장직을 수행하며 주민들과 소통한 그는 1989년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주주 공모를 통해 '남해신문'을 창간, 대표이사로서 지역 언론의 역할을 수행하며 신망을 쌓았다. 불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그의 인내심과 풀뿌리 활동은 훗날 정치적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
■전국 최연소 군수에서 최연소 장관으로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무소속으로 남해군수에 출마한 김두관은 민주자유당 후보를 꺾고 만 36세의 나이로 당선됐다. 전국 최연소 지방자치단체장 기록이었고, 이 기록은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남해를 살기 좋은 고장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어촌 개발과 관광 인프라 구축에 매진한 그는 1998년 재선에도 성공하며 8년간 군정을 이끌었다.
2002년 노무현을 만난 후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한 그는 경남도지사 선거에 도전했으나 17%의 득표율로 낙선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눈에 띄어 2003년 2월 참여정부 초대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만 44세, 민주화 이후 최연소 장관이었다. 문재인의 저서 '문재인의 운명'에 따르면 당시 장관직 수행평가에서 1위를 여러 차례 차지할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그러나 2003년 8월 한총련의 미군 부대 기습 시위 사건을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6개월여 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후 2006년 열린우리당 경남도지사 후보로 도전했으나 한나라당 김태호 후보에게 50만 표 차이로 패배했다. 연이은 좌절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야권 단일후보로 경남도지사 당선, '김두관 신화'
2010년 제5회 지방선거. 무소속 신분이었던 김두관은 민주당,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이 참여한 야권 단일 후보 경선에서 전국 최초로 야권 단일후보로 선정됐다. 당시 인권변호사였던 문재인이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경남 전역을 누비며 총력 지원했다. 결과는 53.5%의 득표율, 81만2336표. 한나라당 이달곤 후보를 꺾고 경남도지사에 당선된 것이다.
보수의 심장 경남에서 진보 성향 후보가 광역단체장에 당선된 것은 민선 지방선거 도입 이후 처음이었다. 이는 '김두관 신화'의 절정이었다. 도지사 재임 중 그는 4대강 사업 반대 소송을 주도하며 환경과 지방자치를 지키는 데 앞장섰다. "도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 정치"라는 그의 철학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대통령을 향한 끊임없는 도전
김두관의 정치적 야망은 대통령직을 향해 있다. 2012년 제18대 대선을 앞두고 그는 경남도지사직을 중도 사퇴하는 배수진을 쳤다. 민주통합당 경선에서 "지방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슬로건으로 지방분권을 내세웠으나 문재인 후보에 밀려 3위로 낙선했다. 2021년 제20대 대선 경선에서는 예비경선을 통과한 뒤 이재명 경기지사의 과반 득표를 위해 중도 사퇴하며 당의 단결을 우선시했다. 2016년 경기 김포갑에서 첫 국회의원 당선, 2020년 경남 양산을에서 재선에 성공하며 중앙정치 무대에 안착했다. 그러나 2024년 제22대 총선에서는 양산시 을에서 김태호 후보에게 48.94%의 득표율로 석패했다. 접전 끝의 패배였지만, 보수 텃밭 경남에서 민주당 당적으로 거둔 선전이었다.
■2025년 '개헌 대통령' 선언과 경선 거부
윤석열 대통령 파면으로 조기 대선이 확정된 2025년 4월 7일, 김두관은 진보 진영에서 가장 먼저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제7공화국을 여는 개헌 대통령이 되겠다"며 분권형 4년 중임제 개헌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제7공화국을 위해 임기를 2년 단축해야 한다면 기쁘게 받아들이겠다"는 파격 발언도 화제가 됐다. 그는 "어대명(어차피 대통령은 이재명) 경선으로는 본선 승리가 어렵다"며 완전개방형 오픈프라이머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민주당이 '권리당원 투표 50%·일반 국민 여론조사 50%' 방식의 경선 규칙을 채택하자, 4월 14일 "김대중·노무현 정신을 저버린 경선"이라며 경선 참여 거부를 선언했다. 결국 4월 18일 "개헌과 제7공화국이라는 꿈은 여기서 멈춘다"며 불출마를 선언하고 민주당 승리를 위해 힘을 보태겠다고 밝혔다.
■풀뿌리에서 출발한 입지전적 인물
김두관의 정치 여정은 대한민국 정치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마을 이장이라는 가장 낮은 직위에서 시작해 군수, 장관, 도지사, 국회의원에 이르기까지 풀뿌리에서 올라온 그의 경력은 독보적이다. 특히 보수의 심장 경남에서 진보 정치인으로서 성공한 경험은 중도 확장성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참여정부 초대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내며 얻은 '리틀 노무현'이라는 별명은 그의 정치적 정체성을 상징한다. 다섯 번의 낙선에도 포기하지 않고 도전을 이어온 그의 여정은 "꽃길은 없었다"는 그의 저서 제목 그대로다.
67세의 나이와 당내 지지율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방분권과 개헌이라는 차별화된 의제로 한국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온 김두관. 2025년 대선에서 꿈을 접었지만, 그의 풀뿌리 정신과 개혁 의지는 한국 정치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CEONEWS는 그의 여정을 통해 한국 정치 리더십의 다양한 얼굴을 조명한다.
<김두관 프로필>김두관>
▶ 출생: 1958년 12월 3일, 경남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
▶ 학력: 동아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 경력: 이어리 마을 이장(1988), 제38·39대 남해군수(1995~2002), 제5대 행정자치부 장관(2003), 대통령 정무특별보좌관(2005), 제34대 경상남도지사(2010~2012), 제20·21대 국회의원(2016~2024)
▶ 기록: 전국 최연소 지방자치단체장(만 36세, 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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