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의 궁궐, 이성이 잠든 자리
새벽 두 시의 용산 궁궐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평화로운 안식이 아니라,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의 기괴한 진공 상태였다. 본관 집무실의 무거운 문 너머로 지독한 알코올 냄새와 구역질 나는 고기 기름 냄새가 흘러나왔다.
"한 잔 더! 내 말이... 내 말이 곧 법이라고 안 했어!"
대윤(大尹)의 고함이 복도를 울렸다. 그의 목소리는 이미 혀가 꼬일 대로 꼬여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탁자 위에는 수십 개의 빈 양주병과 맥주 캔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고, 이른바 '폭탄주'라 불리는 기괴한 혼합주들이 투명한 컵 안에서 독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이것이 폐주 대윤이 다스리는 '1000일 천하'의 실상이었다.
대윤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방금 누구에게 무슨 명령을 내렸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블랙아웃'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의 앞에는 권력의 돌격대를 자처하는 '십상시'들이 굽신거리며 술잔을 채우고 있었지만, 그들의 눈에는 충성심 대신 탐욕스러운 계산기만이 돌아가고 있었다.
"전하, 아니 대통령님. 한 잔 더 드시지요. 그래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
누군가의 아첨 섞인 말에 대윤은 껄껄 웃으며 잔을 들이켰다. 술이 그의 이성을 마비시킬수록, 국가의 공적 시스템은 하나둘씩 가동을 멈추고 있었다. 주취(酒臭)가 지배하는 공간에서 합리적인 정책이나 국민의 안위 따위는 안주거리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했다.
그림자의 주인, 황후 희건김의 등장
대윤이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소파에 고꾸라지듯 잠들자, 어둠 속에서 한 여인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대윤의 아내이자, 이 정권의 실질적인 설계자로 불리는 황후 희건김이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유령처럼 가벼웠고, 그녀가 입은 값비싼 실크 드레스는 달빛을 받아 차갑게 번뜩였다.
그녀는 코를 찌르는 술 냄새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잠든 대윤의 주머니를 서슴없이 뒤졌다. 그녀의 손에 잡힌 것은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통치권자의 직인이었다. 황후는 그 작은 인장을 손에 쥐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에게 남편은 권력이라는 무대에 세워놓은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술에 취해 잠든 폐주라... 역사적 재연치고는 너무도 완벽하구나."
그녀는 대윤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하지만 대윤은 그저 거친 코골이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이제 무대의 주인은 교체되었다. 주술에 빠진 황후 희건김과 술에 취한 남편 대윤의 '비이성적 공동 정권'이 본격적인 이빨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지하 밀실의 무령(巫令)
희건김은 직인을 챙겨 본관 지하에 은밀히 마련된 '신당'으로 향했다. 그곳은 첨단 정보통신 장비가 가득한 상황실 옆에 위치한, 지극히 전근대적이고 기괴한 공간이었다. 사방에는 붉은 부적들이 도배되어 있었고, 향로에서는 몽환적인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곳에는 '천공'이라 불리는 기이한 복색의 무속인이 좌정하고 있었다. 그는 희건김이 들어오자 눈을 뜨며 기괴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동북방의 기운이 흉합니다. 오늘 밤, 그곳에 뿌리를 둔 자들을 쳐내지 않으면 봉황의 날개가 꺾일 것입니다."
희건김은 그 무당의 말을 마치 신의 계시인 양 경청했다. 그녀는 대윤의 이름으로 된 백지 명령서를 꺼내 들었다. 무당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마다, 국가의 핵심 관료들의 이름이 적혀 내려갔다. 실력이나 경력은 중요하지 않았다. '관상이 좋지 않다'거나 '기운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 해임의 유일한 이유였다.
이것이 바로 『광령비사』가 말하는 '광령(狂令)'의 본체였다. 국가의 공식적인 인사 시스템은 무당의 혓바닥 끝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황후 희건김은 대윤의 직인을 거침없이 찍어 눌렀다. 붉은 인제(印蹄)가 종이 위에 번지는 모습은 마치 무고한 이들의 피가 튀는 것과도 같았다.
이성의 마지막 저항
다음 날 아침, 용산 대통령실 정무수석실. 30년 넘게 공직에 몸담아온 최 수석은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명령서를 보고 눈을 의심했다. 국가의 핵심 경제 지표를 담당하는 수석들이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전격 교체되었다는 통보였다. 그 자리를 채운 이들은 이름조차 생소한, 희건김의 사조직과 연계된 무명의 인물들이었다.
최 수석은 분노와 공포가 섞인 손으로 대윤의 집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각하!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국가 경제가 풍전등화인데, 이런 식의 인사는 자살 행위입니다!"
하지만 그를 맞이한 것은 대윤의 퀭한 눈동자였다. 대윤은 아직 술이 덜 깬 듯, 초점 없는 눈으로 최 수석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는 해장용이라며 들고 있는 차가운 맥주 캔이 쥐어져 있었다.
"어이, 최 수석... 어젯밤에 내가... 내가 직접 지시한 거야.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우리 집사람이 그러더군. 내가 아주 훌륭한 결단을 내렸다고."
"각하! 영부인의 말이 아니라 시스템을 믿으셔야 합니다!"
최 수석의 절규에 대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맥주 캔을 바닥에 내던지며 고함을 쳤다.
"네가 감히 내 결정을 의심해? 내가 곧 국가야! 내 술자리에서 나온 말이 곧 법이라고! 나가! 당장 나가!"
최 수석이 쫓겨나듯 방을 나가자, 어둠 속에서 희건김이 부드럽게 걸어 나왔다. 그녀는 대윤의 어깨를 주무르며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잘하셨어요. 이제야 진정한 왕의 위엄이 서는군요."
명성왕후의 재림과 몰락의 서곡
그날 오후, 희건김은 거울 앞에 섰다. 그녀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 위로 100여 년 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던 명성왕후의 환영을 겹쳐 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국가를 살리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휘두르는 권력은 주권자의 위임이 아닌, 어두운 무속의 그늘에서 나온 독이었다.
국외에서는 환율이 폭등하고 우방국들의 경고가 빗발치고 있었지만, 용산 대통령실의 장막 안에서는 오직 희건김의 웃음소리만이 가득했다. 그녀는 대윤의 '블랙아웃'을 이용해 국가의 주권을 사유화했고, 대윤은 그 사실조차 모른 채 더 독한 폭탄주 속으로 숨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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