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0만명의 고객 개인정보 유출 사태를 일으킨 쿠팡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사태 발생 후 김범석 의장을 비롯한 지휘부가 국회 청문회에 모두 불참하는 등 책임 있는 자세를 보이지 않고 있는데다 자신들은 '미국기업'이라며 미국 정관계에 로비를 통해 오히려 한국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쿠팡이 지난 25일 개인정보 유출 사태 관련 자체 조사 결과를 기습 발표한 것이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개인정보 유출자가 고객 계정 3300만개 가운데 3000개 계정 고객정보만 저장했고 외부 유출은 없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진심어린 사과나 재발방지 대책 없이 '셀프 면죄부'를 주자 정치권은 물론 소비자단체와 종교계까지 쿠팡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쿠팡 "개인정보 유출 없어" 자체 조사 결과 기습 발표
국회·정부 모두 발끈⋯"일방적 발표" "탐정놀이"
쿠팡은 지난 25일 개인정보 유출 범인을 찾아 자체 조사를 진행했다며 그 결과를 발표했다.
쿠팡에 따르면 중국인 직원인 개인정보 유출자는 고객 계정 3300만개 기본정보에 접근했으나 이중 3000개 계정 고객정보만 저장했다. 해당 정보는 외부에 전송되지 않았다는 것이 쿠팡 측의 주장이다.
또 유출자가 파손 후 하천에 버린 노트북을 회수했으며, 정보 탈취 사실이 알려진 뒤 저장된 자료는 모두 삭제됐다고 밝혔다.
즉, 직원이 고객 개인정보에 접근했으나 실제로 외부에 유출된 것은 없다는 것이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내용의 '셀프 조사' 결과를 공개하면서 사실상 개인정보 유출 사태에 대해 '쿠팡은 무죄'를 주장한 셈이다.
쿠팡 측은 사태 발생 후 진심어린 사과나 재발방지 대책 없이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으로 일관하고 있다. 김범석 의장과 쿠팡 전 대표들이 국회 청문회에 불참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자신들은 미국기업이라며 미국 정관계에 로비를 통해 '한국 정부가 미국 기업을 과도하게 규제한다'는 프레임을 만들어 가고 있다.
무엇보다 조사 결과 발표 당일 대통령실은 각 부처 장관을 소집해 쿠파 사태 대응 방안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일방적인 조사 결과를 밝히자 정부와 정치권은 분노의 목소리를 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즉각 "민관합동조사단에서 확인이 필요한 사항을 기업이 일방적으로 발표했다"며 쿠팡에 강력히 항의했다.
최민희 과방위원장은 2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쿠팡 김범석(의장), 미국 믿고 교만 떨고 있느냐"며 "일부 미국 정치인들이 거짓정보에 속아 쿠팡을 방어하며 대통령을 비난하고 나섰다. 명백한 주권 침해다. 상황을 초래한 김범석의 교만은 국민적 철퇴를 맞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과방위 소속 박정훈 국민의힘 의원도 "쿠팡은 파렴치한 기업이다. 수조원을 퍼부어 유통망을 장악한 뒤 정부가 바뀔 때마다 대관 라인을 바꿔가며 로비로 리스크를 덮어왔다"면서 "중국인에게 보안 시스템을 맡겼다가 털리고 이제는 트럼프 정부를 상대로 로비해 위기를 돌파하려고 한다"고 비판했다.
박 의원은 "대한민국에서는 그렇게 사업하면 안 된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매출 10%를 과징금으로 부과하고, 영업정지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며 "이대로 넘어가면 우리는 정말 쿠팡의 노예가 된다"고 덧붙였다.
과방위 소속 이해민 조국혁신당 의원은 "쿠팡은 갑자기 수사기관 흉내를 내는 것이냐"며 "쿠팡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조사는 민관합동조사단과 경찰에서 조사 중이다. 셀프 수사라니"라고 비판했다.
이어 "이런 역할극 말고 국회 자료 제출 요구와 청문회에 성실히 임하기를 바란다"며 "국회 연석청문회에서도 지속적으로 근본적 이슈를 찾아 향후 처벌 근거를 마련하겠다"고 다짐했다.
쿠팡 "정부 지시 따라 조사 진행"
쿠팡은 자체 조사 결과 발표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자 진실게임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번 자체 조사는 '정부의 지시에 따라' 이뤄졌다는 것이다.
쿠팡은 26일 보도자료를 통해 "정보 유출자로부터 알게 된 새로운 사실, 진술서, 장비 등을 받은 즉시 정부에 제출했다"면서 "조사는 '자체 조사'가 아니었고, 정부의 지시에 따라, 몇 주간에 걸쳐 매일 정부와 긴밀히 협력하며 진행한 조사였다. 그러나 정부의 감독 없이 독자적으로 조사했다는 잘못된 주장이 계속 제기되면서 불필요한 불안감이 조성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쿠팡은 지난 1일 정부와 만나 전폭적으로 협력하기로 약속했다"며 "2일에는 정부로부터 유출 사고에 대한 공식적인 공문을 받았고, 이후 몇 주간 쿠팡은 거의 매일 정부와 협력해 유출자를 추적, 접촉하며 소통해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9일 쿠팡이 유출자와 접촉할 것을 제안했고, 14일에는 정보 유출자를 처음 만났으며, 이 사실을 정부에 보고했다"고 덧붙였다.
또 "16일에는 정부의 지시에 따라 정보 유출자의 데스크톱과 하드디스크 드라이브를 1차 회수해 정부에 보고, 제공했다"며 "쿠팡은 하드 드라이브를 정부에 제출한 즉시 정부가 이에 대한 조사에 착수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밝혔다.
쿠팡은 "지난 18일에는 인근 하천에서 유출자의 맥북 에어 노트북을 회수했다"며 "쿠팡은 정부 지시에 따라 포렌식팀을 투입, 물증을 확보하고 증거를 문서에 기록한 즉시 노트북을 정부에 인계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부는 21일 쿠팡이 하드 드라이브, 노트북, 그리고 세 건의 진술서(지문 날인 포함)를 경찰에 제출하도록 허가했다"며 "수사 과정의 기밀을 유지하고 세부 조사사항에 대해 공개하지 말라는 정부의 지시를 철저히 준수했다"고 말했다.
쿠팡은 "정부의 요청에 따라 쿠팡은 23일 정부와의 협력 사항을 포함, 조사 세부 내용에 대해 추가 브리핑을 실시했다"며 "이후 25일 쿠팡 고객들에게 조사 진행 상황을 안내했다"고 밝혔다.
경찰 "협의 없었다"…쿠팡 노트북 회수 과정도 수사할 듯
하지만 서울경찰청은 이날 쿠팡과 이러한 사안에 대한 협의는 없었다고 밝혔다.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과는 지난 21일 쿠팡이 임의 제출한 '유출 피의자가 작성했다는 진술서'와 '범행에 사용됐다는 노트북' 등 증거물을 분석하고 있다.
이 노트북이 실제 피의자가 사용한 게 맞는지, 또 범행에 쓰인 게 맞는지 등을 확인하는 한편, 임의제출 과정에서 데이터 변조는 없었는지도 파악 중이다.
특히 경찰은 쿠팡이 자체적으로 피의자와 접촉한 점, 핵심 증거물인 노트북을 잠수부를 동원하는 이례적 방법으로 임의 회수했다고 밝힌 점에도 법적 문제가 없는지 검토 중이다.
쿠팡 측이 데이터에 손을 댔다면 향후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증거로 사용할 수 있는 자료로서 증거능력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물론, 쿠팡 측에 증거인멸 혐의가 적용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쿠팡의 자체 조사 과정에 대한 수사가 예상되는 만큼 추가적인 압수수색 등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경찰은 고객정보 2차 유출은 없었다는 쿠팡의 자체 조사 결과도 다시 검증할 예정이다.
소비자단체 '1000만' 공동소송 간다…"영업정지 등 최고수준 제재해야"
소비자단체는 대규모 소비자 공동소송에 착수했다. 소비자단체가 주도하는 공동소송으로는 이례적으로 원고단 목표를 1000만명으로 잡았다.
금융소비연맹, 소비자와함께 등 9개 소비자단체가 연대한 한국소비자단체연합은 이날 오후 전현희 민주당 의원과 함께 국회 소통관에서 '쿠팡·SKT 개인정보 유출 손해배상 공동소송 출범식'을 진행하고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로 피해를 입은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공동소송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쿠팡 사건의 경우 1인당 착수금은 1만원, 청구금액은 30만원으로 책정했다.
조연행 금융소비자연맹 회장은 "소송 참가 규모가 작으면 패소해도 그 사람만 배상해주면 되고 참석 안 한 사람들의 소비자 권리는 지켜지지 못한다"며 "소비자단체가 공익적으로 나서서 국민원고단을 1000만명 모아 소비자 주권을 행사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법조계에서는 쿠팡을 상대로 한 공동소송이 잇따르고 있다. 현재까지 법무법인 일로, 청, 호인 등 10여개 로펌이 관련 소송을 준비하거나 진행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개인정보 유출 범위와 책임 주체를 둘러싼 법정 공방을 앞두고 있다.
조 회장은 이를 두고 "유출 이후 수개월이 지난 시점에 확인했더니 3000명이라는 숫자를 내세우는 것은 논점을 흐리려는 주장"이라며 "개별 피해자가 이미 유출 사실을 확인한 상황에서 기업 주장만으로 피해 범위를 단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정부를 향해서는 최고 수준의 제재를 촉구했다.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는 26일 성명을 통해 "쿠팡이 12월 25일 밝힌 자체조사 내용은 국가 수사체계를 무시한 처사이며, 증거 인멸의 우려까지 있는 납득할 수 없는 행위"라며 "정부는 쿠팡에 대해 영업정지 등 가장 높은 수준의 제재를 시행해야 한다"고 밝혔다.
협의회는 "쿠팡은 디지털 포렌식 등 증거를 확보해 수사당국과 협의하고 범죄자의 신병 확보에 나섰어야 함에도 이를 자체적으로 처리했다"며 "수사 대상 기업이 비난 여론을 희석하기 위해 잠수부까지 동원해 노트북을 회수한 행위는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는 심각한 문제"라고 비판했다. 이어 "정부는 개인정보 유출자뿐 아니라 쿠팡의 개인정보 보호 책임자에 대해서도 사법 처리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아울러 "쿠팡은 로비 등을 통한 수사 무마·축소·은폐 시도를 즉각 중단하고, 오는 30일부터 열리는 종합 청문회에 김범석 의장이 직접 출석해 납득할 수 있는 사과와 보상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정부를 향해서는 "영업정지, 택배사업자 등록취소 등 현행법상 가능한 최대 수준의 제재를 검토해야 하며,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을 통해 기업의 책임을 무겁게 묻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협의회는 "이미 많은 소비자들이 쿠팡 탈퇴나 이용 축소에 나서고 있지만, 편의성에 따른 '락인 효과'로 쉽게 이탈하지 못하는 구조"라며 "정부가 소비자 불편과 소상공인 피해를 이유로 강력한 제재를 주저할 경우 쿠팡의 안하무인식 행태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영업정지 등 강력한 조치에 따른 소비자·소상공인 피해를 최소화할 보완 대책을 마련한 뒤, 재발 방지를 위한 선례를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4대 종교계, 쿠팡 김범석 의장 사죄·엄정 수사 강력 촉구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원불교 인권위원회,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 4대 종교 단체는 쿠팡 김범석 의장의 직접 사죄와 정부의 엄정한 강제 수사를 강력히 요구했다.
4대 종교 단체는 이날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쿠팡의 노동 환경과 비윤리적 경영 행태를 규탄했다.
이들은 입장문에서 "모든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며, 노동은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는 거룩한 행위"라며 "대한민국 물류의 거대 장벽 뒤에서 벌어진, 차마 인간의 도리라 믿기 힘든 참혹한 실상을 마주하며 깊은 슬픔과 분노를 억누를 길이 없다"고 말했다.
이들은 "김범석 의장은 '미국인 경영자'라는 가면을 벗고, 전 국민 앞에 나서서 직접 사죄하고 책임 있는 대책을 발표하라"며 "정부와 수사 당국은 쿠팡의 산재 은폐와 증거조작 의혹에 대해 즉각적인 강제 수사에 착수하라"고 촉구했다.
아울러 "더 이상 차가운 물류센터 바닥과 길거리에서 외롭게 쓰러지는 영혼이 없기를, 이윤보다 생명이, 속도보다 안전이 먼저인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고 강조했다.
[폴리뉴스 김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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