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들지 않는 정의⑦] 동아투위 양한수 위원 인터뷰 “독재 앞에 저항하지 않는 것은 굴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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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지 않는 정의⑦] 동아투위 양한수 위원 인터뷰 “독재 앞에 저항하지 않는 것은 굴복”

투데이신문 2025-12-26 15:31: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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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일단의 기자들이 있었다. 권력에 맞서다 강제 해직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와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조선투위) 소속 기자·PD·아나운서. 그들은 유신 독재의 탄압 속에서도 언론 자유를 향한 외침과 진실의 기록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대가는 가혹했다. 자유언론실천선언 이후 권력에 맞선 그들에게 돌아온 건 강제 해직의 칼날이었다. 펜은 칼에 꺾였지만 그들의 자유에 대한 의지와 신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렇게 동아투위와 조선투위의 투쟁은 한국 언론사에 ‘자유’를 새긴 상징적 사건으로 남았다.

그러나 승리의 역사가 기록되는 동안, 정작 그 주역들의 삶은 잊혀지고 외면받았다. 그들은 그렇게, ‘흑백의 시간’ 속에 남겨졌다. 투데이신문은 기획연재 [시들지 않는 정의]를 통해 동아투위, 조선투위의 과거를 되짚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의 언론과 시민사회가 지고 있는 ‘자유의 부채(負債)’를 묻고 지연된 정의 앞에 고개 숙여 용서를 구하고자 한다. 

이번 기획은 인물의 심연까지 포착해내는 한국 사진계의 거장 서대호 작가와 함께했다. 그의 사진 속에 담긴 주름진 얼굴과 한 송이의 꽃은 야만의 시대를 견뎌낸 그들에게 건네는 위로이자 참회의 ‘헌화’다. 투데이신문이 만난 ‘노병’들의 여전히 날 선 눈빛은 시들지 않는 정의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되묻고 있다.

동아투위 양한수 위원이 사진 촬영에 임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동아투위 양한수 위원이 사진 촬영에 임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박효령 기자】카메라 불빛 앞에 선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이하 동아투위) 원로들의 얼굴에서는 오랜 시간 눌러 담아두었던 기억이 서서히 떠오르는 듯 결연한 태도가 엿보였다. 굳게 다문 입술과 잠시 멈춘 시선 사이로 말로 다 꺼내지 못한 세월이 읽혔다.

반세기가 흘렀지만 그들은 자유언론을 지키겠다는 결단이 만들어낸 순간들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검열과 압박 속에서도 침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이 불러온 대가까지 말이다. 

언론의 숨통을 조이던 시대, 그들은 침묵을 강요받는 현실에 맞서 몸으로 부딪혔다. 그렇게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다시 써 내려갔지만 그 치열함이 남긴 상처와 균열은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은 채 그들 안에 남아 있었다.

그 투쟁에는 양한수 위원이 함께했다. 양 위원은 1967년 동아일보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했다. 그는 1974년 유신 체제에 맞서 자유언론실천선언에 참여했고 그 결과 1975년 강제해직을 당했다. 해직 이후 양 위원은 무역회사와 건설회사 해외 근무 등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1991년 말 문화일보 창간을 계기로 그는 해직 16년 만에 언론계에 복귀했다. 이후 동아투위 위원으로 활동하며 자유언론 수호 운동을 이어가는 등 아직까지 당시 투쟁의 의미와 과제를 사회에 알리고 있다. 

이번 기획은 그 오래된 한 개인의 궤적과 기록을 다시 현재로 불러내는 시도였다. 또 늦은 용서를 구하는 시간이었다. ‘정의는 시들지 않는다’라는 주제로 진행된 촬영에서 양 위원은 ‘열정’을 뜻하는 칼라 릴리(Calla Lily) 한 송이와 마주했다. 언론인으로서 더 나은 세상을 향해 품어온 열망, 오랜 시간 지켜온 신념이 여전히 식지 않았음을 꽃을 통해 강렬하게 드러냈다. 

촬영을 마치며 양 위원은 50여 년 전의 기억이 다시 선명하게 떠오른다고 말했다. 당시의 투쟁을 두고 그는 “기자로서의 직무와 양심에 충실했던 선택”이었다고 담담히 회상했다. 긴 세월을 견뎌온 그 고백 앞에서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다. 그에게 진정한 ‘용서’란 과연 무엇일까. 

동아투위 양한수 위원. ⓒ서대호 작가
동아투위 양한수 위원. ⓒ서대호 작가

언론의 신뢰 회복을 간절히 소망하다 

Q. 이번 촬영은 ‘시들지 않는 정의’를 주제로, 50여 년 전 자유언론을 지키기 위해 내렸던 선택과 그 이후의 시간을 다시 불러내는 시간이었다.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아 있던 기억을 꺼내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궁금하다. 

낯선 경험이었다. 크게 긴장되지는 않았지만 처음 해보는 일이다 보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많이 어려웠고 고민도 많았다. 특히 그 시절의 기억이나 힘들었던 순간들을 글이나 말이 아닌 얼굴로 담아내야 했기 때문에 더욱 신중했다.

Q. 이번 기획에서 사진 촬영은 서대호 작가가 맡았다. 두 사람의 호흡은 어땠나. 

아주 멋있게 내 모습을 잘 담아준 것 같아 감사하다. 감정을 잘 이끌어내 줘서 51년이 지났는데도 기억이 더욱 생생하게 떠올랐던 것 같다. 촬영이 끝난 지금도 그 시절의 장면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머릿속에서 필름처럼 돌아가고 있는 듯하다.

Q. 이번 기획은 그동안 충분히 건네지지 못했던 사과의 마음을 동아투위와 조선투위 원로들에게 전하고 정의와 책임의 의미를 다시 묻기 위해 시작됐다. 아직도 가해 주체들의 진정한 사과와 보상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위원님이 생각하는 ‘용서’란 무엇인지 듣고 싶다. 

동아일보가 과거에 저질렀던 과오에 대해서는 지금도 개인적으로 용서할 생각이 없다.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한마디의 사과도 없었다. 가해자가 침묵하는데 우리가 그들을 용서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긴 시간이 흐르다 보니 친정인 동아일보가 언론사로서 다시 바로 서길 바라는 마음은 한편에 남아 있다. 당시 동아일보는 국민들에게 전폭적인 사랑을 받던 신문이었다. 이른바 ‘백지광고’ 사태 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격려금을 보내줄 정도로 신뢰와 영향력이 컸다. 유신정권 시절에도 다른 신문이 침묵하던 학생 시위, 기도회, 시국 미사 등을 보도하며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매체였다.

지금의 언론 환경에서는 그런 영향력과 신뢰를 모두 갖춘 언론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동아일보를 비롯해 모든 언론이 다시 한번 권위와 신뢰를 되찾아 시민들에게 의미 있는 영향력을 미치는 언론이 나타나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1975년 3월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양한수 기자(오른쪽)가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본인]
1975년 3월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양한수 기자(오른쪽)가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본인]

 ‘굴복하지 않겠다’는 신념 하나로 

Q. 책 <우리는 아직 거리에> 를 보면 과거 흑백사진들을 여러 장 찾아볼 수 있는데 흑백으로 진행된 이번 촬영에 함께하면서 떠오르는 과거 사진 혹은 장면이 있다면. 

1975년 자유언론실천선언 족자를 걸어두고 그 앞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그것은 단순한 기록 사진이 아니라 당시 우리가 목숨처럼 지키고자 했던 언론의 자유와 신념이 응축된 상징적인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투쟁 당시 단식조에 참여했을 때의 기억도 생생하다. 곡기를 끊은 지 3~4일쯤 지나자 정신은 몽롱해지는데 마음은 가벼워지는 경험을 했다. 그때 느꼈던 비장한 책임감, 그리고 동지들과 나눈 끈끈한 연대감은 평생 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외부에서 철문을 부수고 들이닥친 폭도들이 우리를 강제로 끌어내 연행하던 그 순간, 그때 온몸으로 느꼈던 처참한 무력감과 치솟던 분노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Q. 이번 촬영을 계기로 자유언론실천선언의 현장에 서 있던 동아일보 기자 시절의 자신과 마주한다면 어떤 말을 건네고 싶은지. 

주저 없이 “잘했다”고 격려해주고 싶다. 만약 지금 다시 그때와 같은 상황이 주어진다면 과연 똑같이 행동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언론이 권력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 하나로 움직였다. 우리의 투쟁은 출세나 부귀영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기자로서의 직무와 양심에 충실하기 위함이었다.

그 시절 우리는 언론과 사회가 꽁꽁 얼어붙은 상태였다고 느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는 작은 구멍이라도 내야 전체가 깨질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이 바로 그 첫 구멍을 뚫는 일이었고 그 점에 대해서는 지금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독재 앞에 저항하지 않는 것은 곧 굴복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 때문에 모진 고생을 감내해야 했던 가족을 생각하면 늘 미안하고, ‘좀 더 잘해줄걸’ 하는 아쉬움이 있다. 허나 당시에는 개인의 안위보다 언론인으로서의 사명과 책임감이 더욱 앞섰기 때문에 이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동아투위  양한수 위원이 사진 촬영에 임하면서  “그 시절의 기억이나 힘들었던 순간들을 글이나 말이 아닌 얼굴로 담아내야 했기 때문에 더욱 신중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투데이신문
동아투위  양한수 위원이 사진 촬영에 임하면서  “그 시절의 기억이나 힘들었던 순간들을 글이나 말이 아닌 얼굴로 담아내야 했기 때문에 더욱 신중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투데이신문

보도의 역할과 그 가치를 위해 

Q. 그동안의 투쟁과 이번 기획이 어떤 의미로 기억되고 남기를 바라나.

언론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을 넘어 국민의 정서와 감정까지 담아냄으로써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시민들이 언론을 신뢰할 때 비로소 그 보도는 사회적 흐름을 바꾸는 힘을 갖게 된다. 우리가 온몸으로 진실을 전하려 했던 그 치열한 몸부림이 독재 체제를 흔들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 기획이 언론의 본질적 가치를 지켜나가는 여정이 되길 바란다. 더 나아가 우리 동아투위의 투쟁이 권력에 맞서 진실을 지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이 많은 이들에게 오래 기억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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