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연말이 되면 송년회와 각종 모임이 이어지며 음주 빈도도 높아진다. “이 정도는 괜찮다”는 인식 속에 다음 날 숙취만 넘기면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 퍼져 있지만, 의료계는 오히려 이 시기 가장 경계해야 할 장기로 간을 꼽는다. 간은 손상은 상당 부분 진행되기 전까지 뚜렷한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침묵의 장기’로 분류, 연말 음주가 누적될수록 위험이 커질 수 있어서다.
질병관리청 2025년 지역사회건강조사에 따르면 월 1회 이상 음주하는 비율은 57.1%로 절반을 넘어섰다. 한 번의 술자리에서 남성은 소주(50㎖)·맥주(200㎖) 7잔 이상, 여성은 5잔 이상의 음주를 주 2회 이상 반복한 ‘고위험 음주’ 비율도 12%에 달했다. 코로나19 유행 시기 일시적으로 감소했던 음주율은 일상 회복 이후 반등하는 흐름이다.
간은 체내 해독과 대사를 담당하는 핵심 기관이지만, 지방간이나 초기 간염 단계에서는 특별한 통증이나 자각 증상이 거의 없다. 피로감이나 소화불량, 오른쪽 윗배 불편감이 나타날 때는 이미 손상이 상당 부분 누적된 경우가 적지 않다.
과도한 음주로 발생하는 알코올성 간질환은 대부분 지방간에서 시작, 이 단계에서는 금주만으로 회복이 가능하다. 그러나 음주가 지속되면 알코올성 간염으로 진행되고, 이후 간세포가 섬유화되면서 간경변증으로 악화된다. 간경변증 단계에 이르면 간암 위험이 급격히 커지고, 이전 상태로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
이런 특성 탓에 연말이 되면 간 손상을 조기에 발견하기보다, 음주 이후의 컨디션 회복에 초점을 맞춘 소비가 먼저 늘어난다. 제약업계는 연말 시즌을 겨냥해 숙취 해소와 간 건강 관리 제품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동아제약은 숙취 완화에 더해 간과 위 점막 보호까지 포괄하는 콘셉트의 ‘모닝케어’ 제품군으로 연말 판촉을 강화했고, 일동제약 역시 숙취 해소 기능성 음료 ‘술 확 깨는 꿀 노니 액’을 출시하며 약국 채널 중심의 마케팅에 나섰다. 연말 음주가 반복되는 환경에서 ‘빠른 회복’과 ‘사후 관리’를 원하는 수요가 시장으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약국에는 ‘실리마린’ 성분을 활용한 간 보호 의약품, 밀크씨슬 기반 건강기능식품, 필름형 숙취 완화제 등이 함께 진열돼 있다. 숙취 해소에서 간 보호, 회복 관리까지 제품군은 점점 세분되는 모습이다. 다만 의료계에서는 이런 소비가 간 손상을 조기에 발견하거나 질환의 진행을 차단하는 해법이 되기는 어렵다고 지적한다.
김형준 동남권원자력의학원 소화기내과 과장은 “의학적으로 안전한 음주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며 “술은 우리 몸에 독소로 작용하지만, 한국 사회는 음주에 지나치게 관대한 편”이라고 말했다. 숙취 여부로 위험을 가늠하는 통념과는 거리가 있다는 해석이다.
특히 ‘주량이 늘었다’는 체감이 위험한 착시가 될 수 있다고도 경고한다. 김 과장은 “알코올 분해 효소는 음주 빈도와 무관하다”며 “술을 자주 마시면서 주량이 늘었다고 느끼는 건 오해”라고 덧붙였다. 술을 마시면 얼굴이 붉어지는 사람은 분해 효소가 부족하다는 신호일 수 있어 더 주의해야 한다는 설명도 나왔다. 연말에 반복되는 음주는 개인의 체질과 회복력에 따라 위험이 다르게 누적될 수 있다는 게 의료계 설명이다.
알코올성 지방간은 대부분 무증상으로 진행된다. 혈액검사에서 간수치(AST·ALT) 상승 여부를 확인하고, 초음파나 CT로 간 내 지방 침착을 확인해 진단하는 경우가 많다. 피로감이나 오른쪽 윗배 불편감, 식욕 저하, 소화불량이 뒤늦게 나타나거나 황달·복수 증세가 보인다면 즉시 간 건강을 점검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전호수 이대서울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알코올은 1군 발암물질에 해당한다”며 “특히 반복적인 고위험 음주는 간 기능 저하를 넘어 지방간·간염·간경화·간암으로 이어질 수 있어 위험성을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간만의 문제’로 축소해서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의료계에 따르면 알코올성 간염은 금주 시 간수치가 4~6주 내 정상화되는 사례가 적지 않아 절주·금주만으로도 개선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반면 음주가 지속돼 지방간이나 간염 단계에서 멈추지 않고 알코올성 간경변증으로 진행될 경우, 술을 끊더라도 회복에는 한계가 따른다. 증상이 없더라도 정기적인 건강검진이 필요하다는 권고가 나오는 배경이다.
최근에는 비만·당뇨병 등 대사 이상이 동반된 환자에서 ‘대사 관련 알코올성 지방간 질환’이 주목받는 등, 간 질환이 생활 습관 전반과 맞물리는 양상도 뚜렷해지고 있다. 국내 연구진이 운동 시 분비되는 호르몬(바이글리칸)이 간으로 이동해 지방 축적을 억제하고 간세포 노화·산화 스트레스를 완화한다는 사실을 규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숙취를 줄이는 기술’보다 ‘지방간으로 가지 않게 하는 구조’가 중요하다는 신호로 읽힌다.
부득이하게 술을 마셔야 한다면 음주 간격을 충분히 두고 남성은 소주 반병 이하, 여성은 두 잔 이하로 제한하며 음주 후 최소 2~3일 이상 간에 휴식을 주라고 권한다. 전 교수는 “술에는 안전한 기준이 있다고 보긴 어렵다”며 “피할 수 없는 경우라도 한 번의 음주에서 남성은 4잔, 여성은 2잔을 넘기지 않는 선이 바람직하고, 음주 후에는 최소 3일 이상 쉬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이어 “금주하며 간이 회복할 시간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Copyright ⓒ 이뉴스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