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야자 열매 / 픽사베이
세계 당뇨병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의외의 풍경이 펼쳐진다. 파키스탄 국민 10명 중 3명이 당뇨병 환자다. 쿠웨이트, 이집트, 카타르가 그 뒤를 잇는다. 미국이나 중국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스펙테이터 인덱스가 공개한 국가별 당뇨병 유병률 자료는 중동과 남아시아 이슬람 국가들이 상위권을 석권하고 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준다. 경제 규모나 의료 수준과는 별개로, 식문화가 건강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통계다.
스펙테이터 인덱스는 호주 의사 압둘-라티프 할리미가 운영하는 소셜 미디어 계정이다. 각종 통계를 시각화해 제공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X(옛 트위터)를 중심으로 전 세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의 데이터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며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스펙테이터 인덱스가 공개한 국가별 당뇨 유병률 자료에 따르면 파키스탄의 당뇨병 유병률은 30.8%로 압도적 1위다. 쿠웨이트가 24.9%, 이집트가 20.9%, 카타르가 19.5%로 뒤를 잇는다. 말레이시아(19%), 사우디아라비아(18.7%), 멕시코(16.9%), 터키(14.5%)도 높은 수치를 보인다. 미국은 10.7%로 13위, 중국은 10.6%로 15위다.
이 통계를 본 한 네티즌은 "작은 췌장을 갖고 있음에도 한국은 제법 선방했다"며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해당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당뇨병 유병률은 6.8%로 24위를 기록했다. 일본 6.6%, 호주 6.4%, 이탈리아 6.4%, 영국 6.3%와 비슷한 수준이다.
당뇨병은 혈당을 조절하는 인슐린이 제대로 분비되지 않거나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못해 발생하는 대사질환이다. 췌장에서 만들어지는 인슐린이 부족하면 혈액 속 포도당이 세포로 들어가지 못하고 혈중 농도가 높아진다. 제1형 당뇨병은 췌장에서 인슐린을 전혀 생산하지 못하는 경우로 주로 유전적 요인이나 자가면역 질환으로 발생한다. 제2형 당뇨병은 인슐린이 분비되지만 제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분비량이 충분하지 않은 경우다. 전체 당뇨병 환자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주요 원인으로는 유전적 요인, 비만, 운동 부족, 스트레스 등이 꼽히지만 식습관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특히 고당분 식품의 과다 섭취, 불규칙한 식사, 폭식과 금식의 반복은 췌장에 큰 부담을 준다.
이슬람권 국가들에서 당뇨병이 유독 많이 발생할까. 그들의 식문화에 답이 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즐겨 먹는 대표적 간식이 바로 대추야자다. 대추야자는 야자나무과에 속하는 데이트 팜이라는 나무의 열매로, 중동과 북아프리카가 원산지다. 영어로는 데이츠(Dates)라고 부른다. 한국의 대추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과일이다. 길이 3~7cm 정도의 타원형 열매다. 겉은 갈색, 속은 황금빛을 띤다. 생으로 먹을 때는 아삭한 식감과 은은한 단맛이 난다. 주로 말려서 먹는데 건조 과정을 거치면 당도가 설탕 절임인가 싶을 정도로 엄청나게 높아진다.
말린 대추야자 열매 / 픽사베이
건조 대추야자는 무려 70%가 당분으로 이뤄져 있다. 이는 설탕 덩어리를 먹는 것과 다름없는 수준이다. 당도가 매우 높을 뿐 아니라 당 부하지수도 높아 혈당 관리에 불리하다. 당 부하지수는 특정 음식을 섭취했을 때 실제로 혈당에 미치는 영향을 나타내는 지표다. 대추야자는 한 번에 여러 개를 먹는 경우가 많아 당 부하지수가 높게 나타난다. 꿀처럼 달콤하면서도 식감이 쫄깃하고 고소한 맛도 있어 간식이나 디저트로 애용된다. 식이섬유가 풍부하고 칼륨, 마그네슘, 철분 등 미네랄이 많아 영양학적으로도 가치가 높다지만 당분 함량이 워낙 높아 과다 섭취는 건강에 해롭다. 중동 지역에서는 대추야자를 그냥 먹기도 하고, 견과류를 채워 넣거나 초콜릿으로 코팅해서 먹기도 한다. 커피나 차와 함께 하루에도 여러 개씩 먹는 것이 일상이다. 주식처럼 다량 섭취하는 습관이 혈당 관리를 어렵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다.
문제는 이슬람 최대 명절인 이드 알 피트르 기간이다. 무슬림들은 한 달간 라마단 금식을 한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는다. 이슬람력으로 아홉 번째 달인 라마단 기간 동안 건강한 성인 무슬림은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일체의 음식과 물을 입에 대지 않는다. 하루 12시간 이상을 굶는 셈이다. 라마단이 끝나면 이드 알 피트르 축제가 시작되는데, 이때 고열량의 달콤한 음식을 대량으로 섭취하며 빠르게 에너지를 보충한다. 케이크, 과자, 튀김, 고기 요리 등 평소보다 훨씬 많은 양의 음식을 먹는다. 장시간 공복 상태에서 갑자기 고당분 음식을 먹으면 혈당이 급격히 올라가는 혈당 스파이크 현상이 나타난다.
혈당 스파이크는 식후 혈당이 급격히 상승했다가 떨어지는 현상이다. 반복되면 췌장이 지치고 인슐린 저항성이 생겨 당뇨병 발병 위험이 높아진다. 또한 혈관 손상을 일으켜 심혈관 질환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라마단 기간 자체도 문제다. 해가 진 후 첫 식사인 이프타르를 할 때 전통적으로 대추야자로 시작한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금식을 깰 때 대추야자를 먹었다는 전승 때문에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금식 후 첫 음식으로 대추야자를 먹는 것이 관습으로 자리 잡았다. 장시간 굶은 상태에서 해가 지자마자 고칼로리, 고당분 식사를 몰아서 하는 습관은 췌장에 엄청난 부담을 준다.
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AI 툴로 제작한 이미지.
실제로 라마단 기간 동안 당뇨병 환자들의 응급실 방문이 늘어난다는 연구 결과가 여러 차례 발표됐다. 장시간 공복 후 급격한 식사로 인한 혈당 조절 실패가 주요 원인이다. 이런 식습관이 매년 반복되면서 당뇨병 발병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중동 지역 의료계에서도 라마단과 이드 알 피트르 기간의 식습관 문제를 지적하며 건강한 금식 방법을 권장하고 있지만 오랜 문화적 전통을 바꾸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여기에 중동 지역의 기후적 특성도 당뇨병 유병률을 높이는 데 한몫한다. 중동은 연중 고온 건조한 날씨가 이어진다. 여름철에는 낮 기온이 40도를 훌쩍 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환경에서는 야외 활동이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 실내에서 에어컨을 틀고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좌식 생활 비중이 높아진다. 신체 활동 부족은 비만과 당뇨병을 유발하는 핵심 원인이다. 운동 부족으로 인한 에너지 소비 감소와 고당분 식습관이 결합하면서 당뇨병 위험이 늘어나는 셈이다.
한국은 일본(6.6%), 호주(6.4%), 이탈리아(6.4%), 영국(6.3%)과 비슷한 수준이다. 프랑스(5.3%), 러시아(5.6%), 아르헨티나(5.4%)보다는 높지만 상위권 국가들에 비하면 낮은 편이다. 하지만 안심할 수준은 아니다. 한국의 당뇨병 유병률은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이며, 특히 젊은 층의 당뇨병 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 우려스럽다.
한국인은 서양인에 비해 췌장 크기가 작다는 연구 결과가 여러 차례 발표됐다. 췌장이 작으면 인슐린 분비 능력도 떨어진다. 서양인은 비만해도 췌장에서 인슐린을 많이 분비해 어느 정도 버티지만, 한국인은 조금만 살이 쪄도 췌장이 감당하지 못한다. 실제로 체질량지수 25 정도의 과체중 수준에서도 당뇨병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서양인은 체질량지수 30 이상의 고도비만에서 당뇨병 발병률이 높아지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래서 체질량지수가 높지 않아도 당뇨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 한국인은 유전적으로 당뇨병에 취약한 체질이니 식습관 관리가 더욱 중요하다는 얘기다.
최근 한국에서도 고당분 음료와 디저트 섭취가 늘어나는 추세다. 밀크티, 프라페, 케이크, 마카롱, 도넛 같은 달콤한 음식이 일상화하고 있다. 카페 문화가 확산하면서 당도 높은 음료를 하루에도 여러 잔 마시는 사람이 많아졌다. 배달 음식과 편의점 간편식의 증가로 나트륨과 당분 섭취량도 함께 늘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불규칙한 식사, 야식, 과식이 반복되고 운동 부족까지 겹치면서 당뇨병 위험 요인이 계속 쌓이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의 식습관 변화가 두드러진다. 전통적인 한식 위주의 식단에서 벗어나 서구식 식습관을 따르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당 섭취량이 급증했다.
작은 췌장을 가진 한국인에게는 위험 신호다. 음식을 조금만 잘못 먹어도 췌장에 무리가 간다. 이슬람권 국가들의 높은 당뇨병 유병률은 문화와 종교적 전통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사례인 동시에 한국인에게도 경각심을 일깨운다. 건강한 식습관 없이는 췌장 크기도 소용없다는 교훈을 세계 당뇨병 지도는 말해주고 있다. 달콤한 유혹 앞에서 한 번 더 생각하는 것. 그것이 한국인들의 작은 췌장을 지키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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