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출신의 코넬 아마리에이(Cornel Amariei)에게 장애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삶의 배경이었다. 부모님은 모두 운동 장애가 있었고, 여동생은 정신 장애를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면서 아마리에이는 자신이 가진 자원이 제한적이라는 사실도 일찍이 깨달았다.
7살에 프로그래밍을 배우고 13살에 로봇을 만든 것은 천재성 이전에 절실함의 결과였다. 기술이 부족해 불편을 겪는 가족들을 보며, 그는 “왜 장애인을 위한 기술은 이토록 느린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하기 위해 발명가의 길을 걷게 됐다.
아마리에이는 루마니아 최초의 고등학교 로봇 동아리를 설립했고, 고등학교 재학 시절 회사를 설립했다. 아두이노 플랫폼 관련 임베디드 프로그래밍 서적도 써냈다. 졸업 이후 글로벌 자동차 부품사 콘티넨탈에서 자율주행과 스마트 센서 프로젝트를 총괄하던 아마리에이는 2020년 돌연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스타트업 ‘닷루멘(.lumen)’을 설립했다. 자율주행, 스마트 센서, 전기차 관련 기술을 다뤘던 경험과 노하우를 이제 ‘사람의 걸음’을 위해 쓰기로 결심한 것이다.
“안내견을 없이도 갑니다”…이마에 그려지는 디지털 지도
닷루멘이 개발한 웨어러블 기기는 자율주행 자동차의 메커니즘을 안경 형태로 압축했다. 6개의 카메라와 야간용 적외선 레이저 등이 초당 100회 이상 주변 데이터를 분석한다. GPS 시스템과 함께 작동하기 때문에 지면과 머리 위의 장애물을 함께 감지한다.
닷루멘은 시각 정보가 없는 사용자에게 소리로만 안내하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햅틱(진동) 피드백’을 전면에 내세웠다. 닷루멘의 기기는 빔포밍 스피커의 음성 안내와 함께, 이마에 정교한 진동을 전달한다. 마치 보이지 않는 안내자가 가야 할 방향을 이마 위에서 손가락으로 짚어주는 듯한 방식이다.
더불어 인공지능이 횡단보도를 식별하고, 장애물을 피하며, 흰 지팡이로는 감지하기 어려운 머리 위의 장애물이나 바닥의 물웅덩이까지 미리 감지해 진동으로 경고한다.
예컨대 이 기기를 착용하면 “스타벅스로 가자”라는 명령만으로 주문 카운터 앞까지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다. 오랜 훈련과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 안내견의 역할을 기술이 훌륭하게 보조하는 셈이다.
1kg의 무게에 담긴 ‘독립’의 가치
닷루멘이 내놓은 시제품은 배터리와 센서 탓에 무게가 약 1kg으로 묵직한 편이며, 한 번 충전에 2시간 정도 사용할 수 있다. 아직은 개선이 필요한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반응은 뜨겁다.
지난 10월 진행된 사전 예약에서 단 10일 만에 1500건의 주문이 몰렸다. 9,999유로(약 1700만원)이라는 고가에 판매됨에도, 전 세계 시각장애인들이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걷는 자유’에 기꺼이 응답한 것이라는 평가다.
코넬 아마리에이는 현재 400명이 넘는 시각장애인 테스터들과 함께 실제 도시와 시골을 누비며 제품을 다듬고 있다. 2026년 1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리는 CES 2026에서 그 완성본이 전 세계에 공개될 예정이다.
아마리에이는 “우리는 시각장애인들에게 단순히 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어디든 혼자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선물한다"라고 밝혔다. 이 웨어러블 기기가 대중화되면, 전 세계 시각장애인들의 삶의 반경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넓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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