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운동'스럽다는 집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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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동'스럽다는 집의 정체

엘르 2025-12-26 00:00:00 신고

한옥과 붉은 벽돌의 다가구 주택으로 이뤄진 서촌 골목길. 그 사이에 들어선 청운동 캐빈은 동네의 질서를 따르면서도 단단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한옥과 붉은 벽돌의 다가구 주택으로 이뤄진 서촌 골목길. 그 사이에 들어선 청운동 캐빈은 동네의 질서를 따르면서도 단단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다갈색 벽돌, 유리블록,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한 문 등 다양한 재료가 이채로운 조화를 보여준다.

다갈색 벽돌, 유리블록,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한 문 등 다양한 재료가 이채로운 조화를 보여준다.


계단 우측으로는 서재와 화장실, 세탁실과 정원으로 이어지는 복도가 있다. 주거의 일반적인 건축 어휘를 따르지 않고, 여러 재료를 병치해 작지만 다양한 감각을 부여했다.

계단 우측으로는 서재와 화장실, 세탁실과 정원으로 이어지는 복도가 있다. 주거의 일반적인 건축 어휘를 따르지 않고, 여러 재료를 병치해 작지만 다양한 감각을 부여했다.


‘집은 공상을 담는 그릇이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 속의 문장처럼, 회화 작가 유지민에게 첫 집 짓기란 아이의 정서를 품을 공간을 만드는 일이었다. “출산 이후 줄곧 경기도와 서울의 고층 아파트에서 살았어요. 이사도 잦았고요. 저는 자연 가까이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는데, 그 경험이 감수성과 삶의 태도에 큰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거든요. 아이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으면 했죠.” 2020년 가을, 남편의 MBA 과정을 위해 온 가족이 2년간 바르셀로나로 떠나게 됐다. 출국까지 남은 10개월. 그동안 부부는 귀국 후에 정착할 집을 찾아 나서기로 결심했다. 도심보다 자연을 두른 한적한 동네를 알아보던 중, 마침 서촌에 급매로 나온 작은 땅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옥 처마와 낮은 담장이 이어지는 골목길, 인왕산 산책로까지 걸어서 5분이면 닿는 청운동은 세 가족에게 더없이 이상적인 동네였다. 바로 맞은편에 아이가 다닐 초등학교가 있었고, 주변에는 청운문학도서관과 갤러리, 박물관 등이 자리했다. 도시가 지닌 편의성과 옛 정취, 자연 환경을 두루 누릴 수 있는 이곳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마침 유지민의 첫 개인전도 근방에서 열렸고, 향후 작품 활동을 재개할 때도 여러모로 의미가 깊을 것 같았다. 처음엔 리모델링을 고려했지만, 청운동의 대지를 만나면서 첫 집 설계를 향한 여정이 시작됐다. 새로운 주거 공간을 함께 그려줄 파트너로 에이오에이 아키텍츠의 서재원 건축가를 선택했다.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나 한 스타일을 따르기보다 저희 가족의 삶과 모양, 색깔을 자연스럽게 집에 녹여 주길 바랐어요. 서재원 건축가의 작업을 보면서 전형적인 건축 문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철학으로 공간을 구성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죠.” 건축주의 열린 시선과 자유로운 감수성은 건축가에게 훌륭한 출발점이 됐다.


부부와 아이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서재. 자연광이 환히 드리우는 이곳은 간접등으로만 구성해 집중에 적합한 환경을 만들었다.

부부와 아이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서재. 자연광이 환히 드리우는 이곳은 간접등으로만 구성해 집중에 적합한 환경을 만들었다.


채광이 좋은 2층에는 넝쿨 식물이 기세 좋게 자라나고 있다. 컴팩트한 1층에 반해 2층은 거실과 주방, 식사 공간이 하나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집이다. 다양한 소재의 멋스러운 조화가 돋보이는 뒷뜰. 이곳에서 가족들은 허브 식물을 가꾸고, 간이 테이블과 의자에서 식사를 즐긴다.

디비디비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주방가구를 두었다. 우드 소재의 상하부장 사이 강철 소재의 벽면을 제작해 실용적이면서 포인트가 되어준다.. 의자는 유지민 씨가 수집한 빈티지 제품

디비디비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주방가구를 두었다. 우드 소재의 상하부장 사이 강철 소재의 벽면을 제작해 실용적이면서 포인트가 되어준다.. 의자는 유지민 씨가 수집한 빈티지 제품


두 사람은 처음부터 ‘어떤 집을 지을 것인가’ 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이야기하며 설계를 구체화했다. 사실 정착을 향한 염원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였지만,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전쟁과 팬데믹이 겹치며 자재비가 급등했고, 결국 3층으로 계획했던 집은 2층으로 줄여야 했다. 공사 도중엔 조선시대 유물이 발견돼 한동안 작업이 중단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부부는 포기하지 않았다. 건축가의 감각과 경험을 믿었기에, 수많은 제약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완성에 다가갈 수 있었다. 4년간의 노력 끝에 탄생한 이들의 청운동 캐빈은 83.2㎡ 남짓한 단출한 규모에 가족의 일상과 동네의 정서를 나란히 품고 있다. 신축이지만 외관만 보면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인상을 주는데, 이는 서재원 건축가가 의도한 바다. “이 동네가 지닌 소박한 기품이 집에도 깃들기를 바랐어요. 골목길에서 눈에 띄지 않고 자연스럽게 보였으면 했죠. 연분홍빛 스터코로 외벽을 마감해 단단하면서도 따듯한 질감을 살렸습니다.” 붉은 벽돌 건물이 늘어선 주변 풍경 속에 청운동 캐빈은 조용히 그런 흐름에 녹아든다. 단정하고 반듯한 외관에는 예상치 못한 리듬이 숨어 있다. 1층의 메인 공간인 서재와 화장실, 세탁실과 정원으로 이어지는 복도에는 서로 다른 물성의 재료가 활발하게 교차한다. 돌과 매끈한 트래버틴, 유리블록, 테라코타 타일, 오크나무 등 이질적인 마감재의 조화가 작은 집에 풍부한 표정을 불어넣는다. 특히 가족이 가장 많은 시간을 공유하는 서재에는 손길이 닿는 모든 곳에서 다채로운 감각이 피어난다.


경사지붕이 그대로 드러난 높은 천장과 우뚝선 기둥. 마치 거대한 텐트를 친것 마냥 가족 모두를 하나의 공간안에서 친밀감을 높인다.

경사지붕이 그대로 드러난 높은 천장과 우뚝선 기둥. 마치 거대한 텐트를 친것 마냥 가족 모두를 하나의 공간안에서 친밀감을 높인다.


높은 개방감을 갖기 위해 바닥을 낮게 설계한 서재. 아이가 자주 드나드는 공간이라 적당한 높이의 발받침 가구를 두었다. 한옥의 장지문, 서까래, 처마 등을 현대적으로 차용한 부부의 침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역시 일반적인 형태와 재료의 문법을 따르지 않았다. “계단실 벽체를 검은색으로 도장하고, 두꺼운 금속으로 난간을 세웠어요. 난간의 꺾인 각도를 세밀하게 조정해 집 안의 벽과 날카로운 대비를 이루게 했죠.” 세심함과 투박함 사이, 치밀하게 계산된 디테일의 미학은 2층에서 한층 뚜렷해진다. 노출 콘크리트의 거푸집 자국이 고스란히 남은 지붕과 이를 받치는 기둥은 꼭짓점에서 절묘하게 비껴 있다. “한 가족을 포근하게 감싸는 느낌을 상상하며 우산 모양의 지붕을 떠올렸어요. 기둥은 천막처럼 꼭짓점에 정확히 맞춰야 지지되는 구조가 아니기에 일부러 어긋나게 두었죠.” 덕분에 또 다른 시각적 재미가 생겨났다. 요구사항이 많지 않았던 건축주 부부가 처음부터 원했던 것도 박공지붕이었다. “집이 주는 안정감은 지붕에서 오는 것 같아요. 마치 텐트 안에 있는 것처럼, 이 공간에서도 유난히 아늑함이 느껴져요.” 거실과 주방, 침실로 구성한 2층에는 동그란 창과 크기가 제각각인 사각형 창문으로 자연광이 쏟아진다. 창 너머로 보이는 이웃집과 골목길의 정다운 풍경이 질리지 않는 액자가 돼 준다. 부부의 침실은 한옥 요소를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마치 ‘집 속의 집’처럼 처마와 서까래, 간살문을 갖췄다. 이는 서재원 건축가가 서촌의 맥락을 섬세하게 반영한 결과물이다. 입주한 지 어느덧 1년. 사계절을 지나며 유지민 씨 가족의 일상은 더없이 풍요로워졌다. “창밖으로 이웃집 지붕에 호박이 주렁주렁 매달린 풍경이 보여요. 가끔 운이 좋으면 고양이와 마주치기도 하죠. 또 서재에서 놀던 아이가 바깥에 친구들이 지나가면 창문을 열고 인사를 나눠요. 아파트에서 살았다면 결코 경험하지 못했을 순간이죠.” 동네의 리듬에 맞춰 지은 청운동 캐빈은 삶의 속도를 늦추고, 주변으로 시선을 넓힌다. 땅 가까이 발을 딛고 사는 기쁨을 일깨워주는 집. 진정한 일상의 호사란 이런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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