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치위스키 '2200만 개 오크통'이 쌓여 있는 스토리

실시간 키워드

2022.08.01 00:00 기준

스카치위스키 '2200만 개 오크통'이 쌓여 있는 스토리

저스트 이코노믹스 2025-12-25 08:17:24 신고

3줄요약
패러디 삽화=최로엡 ai화백
패러디 삽화=최로엡 ai화백

 스카치위스키의 화려한 퇴장인가, 고통스러운 재편인가

 19세기 북미에서 유럽으로 전파된 작은 해충(Phylloxera)이 포도나무 뿌리를 파괴하며 유럽 와인 산업을 초토화시킨 대재앙 '필록세라 위기'로 브랜디가 몰락한 틈을 타, 세계 주류 시장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스카치위스키가 2024년 수출액 3.7% 감소라는 성적표를 받아들며 유례없는 위기에 직면했다.

 전 세계적인 고금리와 물가 상승 속에서 고가의 싱글 몰트 판매가 17.2% 급락한 반면, 하이볼용 저가 블렌디드 위스키의 물량은 오히려 늘어나는 ‘가치의 하락’ 현상이 뚜렷해졌다.  여기에 미국 관세 위협과 2,200만 개의 오크통에 쌓인 재고 과잉 리스크가 더해지며 산업 전체가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이어가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안개 자욱한 증류소 창고에는 지금 전 세계 인구가 한 병씩 마시고도 남을 120억 병 분량, 즉 2,200만 개의 오크통이 잠자고 있다. 하지만 이 ‘액체 황금’을 바라보는 업계의 시선은 과거처럼 낙관적이지 않다. 스카치위스키협회(SWA)가 발표한 2024년 글로벌 수출 지표는 이 산업이 처한 기묘한 역설을 그대로 드러낸다.

 2024년 스카치위스키 수출액은 54억 파운드(약 9조 6,365억 원)로 전년 대비 3.7% 감소했다. 60억 파운드(약 10조 7,073억 원)를 돌파하며 환호했던 2022년의 영광은 불과 2년 만에 차갑게 식었다. 더 큰 문제는 수출 물량은 오히려 3.9% 늘어난 14억 병을 기록했다는 점이다. 많이 팔았지만 버는 돈은 줄어들었다. 이는 스카치위스키의 평균 판매 단가가 구조적으로 무너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수치 뒤에는 ‘디-프리미엄화’라는 냉혹한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고금리와 생활비 위기로 지갑이 얇아진 소비자들은 1병에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싱글 몰트 대신, 탄산수에 섞어 마실 저렴한 블렌디드 위스키로 눈을 돌렸다. 실제로 2024년 싱글 몰트 수출액은 17억 파운드(약 3조 336억 원)로 무려 17.2%나 곤두박질쳤다.

 반면 병입 블렌디드 위스키는 4.4% 성장하며 전체 수출의 59.4%를 차지했다. 수익성이 높은 고급 제품군이 무너지고 박리다매형 구조로 체질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숫자가 증명하는 위기와 재고 과잉의 늪

 스카치위스키업계 내부를 더욱 떨게 하는 것은 1980년대 산업을 초토화했던 ‘위스키 로크(위스키 호수)’의 재현 가능성이다. 위스키는 최소 3년, 길게는 수십 년을 숙성해야 하기에 생산자가 10년 뒤의 수요를 완벽히 예측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2010년대 중반의 위스키 붐에 취해 생산 설비를 늘렸던 결과가 이제 거대한 재고의 늪으로 돌아왔다. 디아지오는 과잉 생산을 막기 위해 핵심 맥아 공장인 로즈아일의 가동을 일시 중단했고, 글렌모렌지와 아드벡 같은 유명 증류소들도 수개월간 생산량을 감축하는 비상 수단에 돌입했다.

 여기에 지정학적 폭풍까지 덮쳤다. 최대 가치 시장인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절 부과됐던 25%의 보복 관세가 재도입될 수 있다는 공포에 떨고 있다. 스카치위스키협회는 과거 관세 전쟁으로 인해 산업 전체가 6억 파운드(약 1조 707억 원)의 손실을 입었다고 분석했다.

  영국 와인 및 스피릿 협회(Wine & Spirit Trade Association, WSTA) 마크 켄트는 최근 영국 의회 청문회와 각종 인터뷰를 통해 "미국 시장으로의 수출 둔화는 팬데믹의 여파뿐만 아니라 관세가 남긴 깊은 상처 때문"이라며 "정부가 관세 제거를 위해 모든 외교적 역량을 동원해야 한다"고 절규했다. 실제로 현재 미국 수출액은 9억 7,100만 파운드(약 1조 7,328억 원)로 2019년 대비 9.1%나 줄어든 상태다.

 경쟁자들의 추격도 매섭다. 미국 시장에서는 데킬라가 셀러브리티 마케팅과 프리미엄 숙성 제품을 앞세워 스카치위스키의 점유율을 잠식하고 있다. 젊은 세대는 이제 무거운 오크 향보다는 상큼한 데킬라 기반의 칵테일을 더 선호한다. 아메리칸 위스키 역시 '세계의 위스키'가 되겠다는 야심을 숨기지 않으며 스코틀랜드의 아성을 위협하고 있다.

 중국 시장에서의 부진도 뼈아프다. 2024년 중국으로의 수출액은 31.5%나 폭락했다. 부동산 경기 침체와 경제 불확실성이 중국 부유층의 ‘고급 술 소비’ 본능을 억제한 결과다.

트렌드의 배신과 인도라는 최후의 보루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전역을 휩쓴 하이볼 열풍은 스카치위스키의 생존에는 도움이 됐으나 자존심에는 상처를 남겼다. 한국의 경우 2023년 위스키 수입량이 3만 톤을 돌파하며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지만, 수입 금액은 오히려 2.7% 감소했다. 위스키가 ‘독하고 비싼 술’에서 ‘편하게 섞어 마시는 음료’로 변모하며 대중화에는 성공했지만, 증류소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장인정신이 깃든 고숙성 액체’로서의 프리미엄 가치는 희석됐다. 젊은 소비자들은 위스키의 테루아와 숙성 연도보다는 어떤 탄산수와 섞었을 때 더 청량한지에 더 관심을 둔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업계가 유일하게 희망을 거는 곳은 인도다.

 인도는 이미 물량 기준으로 세계 최대의 위스키 소비국이지만, 현재 150%에 달하는 살인적인 관세가 장벽으로 서 있다. 최근 영국과 인도 간의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되면서 이 관세가 즉각 75%로 낮아지고, 향후 10년에 걸쳐 40%까지 인하될 전망이다. 스카치위스키협회는 이 협정이 본격화되면 향후 5년 내에 10억 파운드(약 1조 7,845억 원) 이상의 추가 수출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인도 시장의 성장은 단순히 숫자를 넘어, 스카치위스키가 아시아 신흥 중산층이라는 새로운 엔진을 장착함을 의미한다.

 디아지오의 최고경영자 데브라 크루는 실적 발표 인터뷰에서 "현재의 거시경제적 환경은 매우 도전적이며 소비자들의 심리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위축되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위스키는 시간의 산물이며 장기적인 펀더멘털은 여전히 견고하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특히 "인도와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성장이 북미와 중국의 부진을 메워줄 것"이라며 시장 다각화에 대한 의지를 피력했다.

 과거 스카치위스키의 성공을 이끌었던 고 이반 메네제스 회장은 '계속 걸어라(Keep Walking)'라는 슬로건 아래 조니워커를 세계 1위 브랜드로 키워냈다. 그가 남긴 유산은 지금 가장 큰 시험대에 올라 있다. 주류 업계는 이제 과거의 영광에 취해 무작정 원액을 찍어내던 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과잉 재고를 관리하기 위한 생산 조절, 하이볼로 유입된 입문자들을 고숙성 제품으로 유인하는 정교한 마케팅, 그리고 관세 장벽을 넘기 위한 정부 차원의 치열한 통상 협상이 병행되어야만 한다.

 스카치위스키의 현주소는 단순한 판매 부진이 아니라, 100년 만에 찾아온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기라는 지적도 많다.

 위스키 로크의 범람을 막고 다시 프리미엄의 가치를 증명해낼 것인가, 아니면 대중 주류 시장의 한 부속품으로 전락할 것인가. 스코틀랜드 증류소들의 불꽃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지만, 그 불꽃이 가리키는 방향은 그 어느 때보다 불확실하다. 지금 스카치위스키가 보여주는 몸부림은 단순한 비명이 아니라, 다시 한번 세계 시장을 지배하기 위해 껍질을 벗어 던지는 고통스러운 혁신의 과정이어야만 한다. 이 싸움의 결과에 따라 우리가 마시는 위스키 한 잔의 무게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Copyright ⓒ 저스트 이코노믹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실시간 키워드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0000.00.00 00:00 기준

이 시각 주요뉴스

알림 문구가 한줄로 들어가는 영역입니다

신고하기

작성 아이디가 들어갑니다

내용 내용이 최대 두 줄로 노출됩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이 이야기를
공유하세요

이 콘텐츠를 공유하세요.

콘텐츠 공유하고 수익 받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유튜브로 이동하여 공유해 주세요.
유튜브 활용 방법 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