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아줌마가 신입 아줌마에게 전수하는 아줌마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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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아줌마가 신입 아줌마에게 전수하는 아줌마의 지혜

엘르 2025-12-23 10:55:45 신고

어느덧 아줌마가 꿈인 적 없던 나는 12년 차 베테랑 아줌마가 됐다. 아줌마의 기준은 결혼일까, 출산일까, 나이일까? 여성들은 늘 이 이름표가 낯설다. 누군가 “아줌마!”라고 부르면 선뜻 뒤돌아 “저요!”라고 대답할 여성이 얼마나 될까? 물론 아저씨란 부름도 그렇다. 도대체 언제 나이를 이만큼 먹었나 싶지만, 내가 어느 타이밍에 들어가고 빠져야 할지 제법 눈치도 좀 생겼고, 내 불운을 타인과 배틀하지 않고 각자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깨달음에 스스로 탄복할 때 나는 아줌마라는 사실이 퍽 마음에 든다. 그러한 지혜에 발가락만 넣었는데 벌써 마흔이라는 사실은 아직 적응되지 않지만 말이다.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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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낳고 1년 정도만 키우면 나의 때가 올 거라 믿었다. 그러나 기다림은 끝이 없었고, 자아실현과 경력 연장이라는 거창한 프로젝트가 아니더라도 소소한 무엇 하나라도 해나가려면 타인의 도움과 미움을 부지런히 받아야 하는 사실에 어이없고 좌절했다. 자괴감마저 들어 내 선택을 의심하고 불안해하며 보낸 10년. 예비 마흔에게 혹은 미래의 신입 아줌마에게 힌트를 주자면 이 세월과 영역을 잘 맞이하려면 이것을 잘해야 한다. 바로 부정하지 않는 마음이다.


내가 얻은 최고의 덕목은 ‘수용’이다. 이것은 포기나 합의가 아니라 지혜다. 인생의 새로운 챕터가 넘어가고 있고, 해보겠다는 마음으로 넘어왔다면 우선 내 역할에 대해 의미와 가치를 찾아보는 자세가 중요한 것 같았다. 나는 너무 행복을 거저 얻으려 했다. 오래 기다려온 내 행복이 예상 밖의 고난과 수행 과정을 거쳐야 느낄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왜 12년 기본 교육과정과 대학 교양 수업에서 ‘사람 키우는 법’과 ‘슬기로운 결혼생활’이라는 배움은 알려주지 않았을까. 제법 매운맛의 아줌마 생활도 걸쭉한 행복을 선사한다는 걸 몰랐을까?


어미로서 운명부터 수용하는 건 내 인생을 이 귀엽고 무서운 아이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나를 잃는 선택 같았다. 아줌마로 살면서 아줌마 역할은 수용하기 힘들었다. 나만의 때와 시간을 기다리며 아이만 바라본 지 10년. 이제야 막내가 다섯 살이 된 요즘, 덜 아프고 덜 울기 시작하니 엄마만의 방을 만들고 혼자 잠을 이룬다. 이런 날이 오기는 오는구나! 그렇다면 고난과 행복이 파도처럼 들이치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나는 그 고민의 답을 ‘연대’에서 찾았다. 10여 년 전 책을 만들면서 개설했던 SNS 계정에는 많지 않지만 얼굴 없는 ‘찐 친구’들이 들어 있다. 실제로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올라온 글과 사진을 보며 공감하고 응원했던 친구들이 있다. 누군가는 인생의 낭비라고 말하는 공간이지만 내가 먼저 솔직해질 용기만 있다면 또 비슷한 결을 가진 사람이 다가온다. 이곳에서 얼굴 없는 친구들과 나무처럼 기대 10년을 웃고 울고 버텨낸 것이다. 잘 빚은 온라인 사회생활은 결국 오프라인으로 이어지고 숨과 체온을 느낄 수 있는 거리만큼 기까워진다.


특히 아가씨 시절부터 아줌마가 된 지금까지 매일 서로의 성장을 지켜본 이들이라 먼 사촌보다 끈끈한 연대감이 생긴다. 아줌마에게 친구란 그런 존재 같다. 어떤 이야기를 펼칠지 이미 뻔하지만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 그녀가 고른 단어와 문장 구조를 그녀만의 목소리로 들을 땐 세상 유일한 말처럼 들린다. 우리 모두 고유한 여성이니까 고유한 말을 전하는 중인 거다. 어느 지점에 다다르면 껍데기만 늙고 나이는 멈추는 것 같다. 그래서 마지막엔 다 친구가 된다. 모두 친구가 되는 아줌마 시절이 이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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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육아 우울증으로 힘들어 숨 막혀 돌아가시기 직전일 때 SNS를 통해 만난 상담사 언니에게 구조 요청을 했다. 그녀는 전화기를 끊지 않고 실시간으로 지시했다. “지민이 가방 들고 와볼래? 가방 안에 뭐뭐 들었니? 그중 너를 위한 물건은 무엇이야?” 당시 나는 그 이어짐이 내 숨구멍 같고, 더할 나위 없이 감사했다. “언니, 가방에서 아기 기저귀, 간식 부스러기, 손수건만 쏟아져 나와요. 나를 위한 립밤 하나 없이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그때 언니가 해준 이야기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지민아, 외국에는 ‘여자의 가방은 집이다(A woman’s bag is her house in motion)’라는 말이 있대. 가방을 보면 그 사람의 일상과 비밀, 감정 상태를 알 수 있대.” 그제야 나는 어릴 때부터 예쁜 빈 상자나 빈 주머니, 빈 서랍, 빈 가방을 너무 좋아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만의 감정을 담는 공간, 시간과 기회가 간절히 필요한 사람이란 걸 알았다. 그제야 아이에게 희생한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아이와 내 기질을 인정하고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나갔다. 누구도 희생하지 않는 공생. 감사한 나의 SNS 언니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올가을, 나는 또 다른 연대를 시작했다. 일명 ‘이불안 여자들!’ 프로젝트다. 이불 안에서 엎드려 누워 SNS로 만나던 불안한 여성, 아줌마들을 모았다. 지난해 이들을 직접 만나고 나눈 감정 프로젝트를 책으로 엮기까지 했다. 수정 테이프 없이, 어떤 작법이나 문법 없이 수정의 흔적까지 찍찍 그어가며 남기며 ‘있는 그대로의 나’를 썼다. 내게 주어진 이야기를 각색 없이 음미해 봤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이대로의 내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기특하기까지 했다. 나를 증명하려는 것도 아주 큰 불안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요즘 릴스로 내 이야기를 올린다. 아줌마의 이야기를 과연 누가 들어줄까 싶지만, 찍으면서 제일 행복하고 신나는 건 ‘나’다. 나를 꺼내 이리저리 두고 보니 세상 오글거리고 어색하다. ‘내가 이렇게 생겼고, 이런 목소리를 가졌구나’를 40년 만에 느껴본다. 여성이라면 느낄 수 있는 불안부터 40대에 접어든 한 인간의 갈등까지 소곤소곤 내 목소리로 전하는 중이다. 어디까지, 누구에게 가닿을지 몰라도 나는 내 불안을 팔아 당신의 평화를 사고 싶다.



전지민

전 에코 라이프 스타일 매거진 〈그린 마인드〉 편집장. 지금은 경기도 양평에서 가족과 함께 여성, 엄마로서 지속 가능한 삶을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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