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군사공학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 베트남전쟁에서 패배한 미국은 공식적인 전쟁사에서 자신들의 패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호치민 루트에 대해 이같이 평가했다. 하노이에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이 '호치민루트박물관'이다. 나 역시 하노이를 여러 번 방문했지만, 이곳은 처음이다.
특이한 것은 이곳은 박물관인데도 점심시간에는 문을 닫는다는 사실이다. 이곳 노동자들의 점심시간을 존중해주는 것이니, 소위 '사회주의' 국가로 바람직한 일이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면서, 카오방에서 시작된 베트남의 무장투쟁에 대해 생각했다.
호치민이 주도하는 '베트민(베트남독립동맹)'은 서서히 농촌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넓혀갔다. 1945년 8월 일본 패망 소식을 듣자, 호치민은 베트남 독립의 결정적인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베트민은 하노이를 장악했고('베트남 8월 혁명')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전승국들은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해 베트남을 중국과 영국이 분할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남쪽을 점령한 영국은, 한반도를 분할점령한 미국처럼 현지 독립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프랑스군의 귀환을 허용했다. 북쪽에 진주한 중국군은, 북한을 점령한 소련처럼 현지 독립정부에 우호적이었고 프랑스군의 귀환을 막았다. 이는 결국 베트남의 분단으로 귀결됐다.
영국군과 중국군이 철수한 뒤 프랑스군은 베트남에 대한 통제를 다시 시도했지만,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북베트남의 지압 장군에 참패하며 베트남에서 철수해야 했다. 대신 남부에 들어선 반공주의 정부는 미국의 지원 하에 '반민족적, 반민중적, 반민주적' 노선으로 나아갔다. 호치민은 '통일(민족해방) 전쟁'에 나섰고 이를 위해 1959년 북부의 병력과 무기를 남쪽으로 침투시키기 위해 오래전부터 있었던 산속 오솔길들에 기초해 호치민 루트 건설을 지시했다.
오후 한 시 반이 되자, 작은 오토바이를 탄 직원이 나타나 박물관의 철문을 열어줬다. '기적'. 박물관에 들어가자 나의 눈에 띈 첫 단어였다. 그렇다. 세계 초강대국 미국의 무차별한 포격에도 수많은 민초들의 땀과 눈물과 피로 호치민 루트를 건설하고 유지해 베트남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은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밑의 숫자들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1959~1975년까지 16년 간 베트남 민중들은 총 2만km의 도로, 터널 등 폐쇄도로 3140km, 도시 간 도로 3800km, 수로 500km, 석유수송파이프 1400km를 건설해서 200만 명의 병사를 내려보냈고, 100만 톤의 무기를 수송했다.
이 도로 건설과 운송에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은 지역의 지형을 잘 아는 소수민족들이었다. 박물관에는 길을 안내하고 짐을 나르고 있는 어린 소수민족 소녀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이런 곳을 중화기를 매고 행진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험준한 지형을 행군하는 북베트남군의 사진을 보고 있자, 문득 2018년 한‧베평화재단의 평화기행을 따라갔다가 만난 베트남의 국민작가 반레와 가졌던 인터뷰가 생각났다(손호철, "아, 베트남, '용서한다고 잊은 것은 아니다" <프레시안> 2018년 3월 21일자).
한국에도 소개된 소설 <그대 아직 살아있다면>의 작가인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소년병으로 자원 입대해 소년병 301명으로 구성된 '영광의 301대대'에 속해 호치민 루트를 따라 내려와 조국해방과 통일을 위해 싸웠는데, 이중 살아남은 사람은 나를 포함해 다섯 명 뿐이었다"고 회고했다. 눈물을 글썽이며 이어진 그의 회고는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소년병 동지 중 절친이 시인을 꿈꾸던 반레라는 친구였는데, 항상 시집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지만, 낮에는 행군하느라고 시를 읽을 시간이 없었고 밤에는 빛이 없어 읽지 못했었어요. 미군이 폭격 전에는 조명탄을 쏘아 올리는데, 그러면 이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 시집을 꺼내 읽곤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폭격 속에 시를 읽다가 폭격을 맞아 죽었지요. 저는 그를 기리기 위해 문학을 시작했고, 그를 기억하기 위해 반레라는 필명을 쓰게 됐습니다."
박물관에서 인상 깊은 또 다른 것은 고엽제 네이팜탄 등 미국이 호치민 루트를 파괴하기 위해 퍼부은 화학무기들을 진열해 놓은 것이다. 박물관에 따르면, 미국은 1961~1971년 사이에 '에이전트 오렌지' 등 고엽제 8천만 톤을 호치민 루트에 투하했고 그 결과 베트남인 중 480만 명이 화학무기에 노출되어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문제는 그 후유증의 대물림이다. 후유증이 자손들에게까지 이어져 4세대 중 지금까지 집계된 희생자는 2000명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이 박물관은 이제 베트남 사람들에게도 '잊혀진 박물관'으로, 관람객은 우리밖에 없었다.
"아니 웬 레닌?" 미국 시애틀 프리몬트 지역 중심가에 가면 생뚱맞게 커다란 레닌 동상이 우리를 맞는다. 소련·동구 몰락과 함께 다른 레닌 동상들과 마찬가지로 군중들이 끌어내려 고물 속에 던져버린 것을 체코를 여행하던 한 시애틀 사업가가 사서 가져온 것이다. 처음에는 주민들이 "흉물스럽게, 웬 레닌동상이냐?"며 페인트를 뿌리는 등 반발했지만 이제는 '공산주의에 대한 서구 자본주의의 승리의 상징'으로 관광명소가 됐다.
이 같은 비극적 운명을 맞은 레닌의 동상들과 다른 대접을 받는 것이 하노이에 있는 레닌 동상이다. 이 동상은 소련·동구 몰락 전인 1982년 베트남 정부가 소련에 부탁해 만들어 1985년 설치한 높이 5.2m의 거대한 동상이다. 베트남은 소련·동구와 달리 아직도 사회주의국가라고 자임하고 있는 만큼, 세계적으로 드물게 아직도 레닌의 동상을 그대로 유지‧보존하고 있다.
하지만 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현실은 여기도 씁쓸하다. 동상 설치와 함께 '레닌 공원'으로 바꾼 공원 이름을 2007년 슬그머니 옛 이름으로 바꿨고, 철거는 하지 않았지만 동상은 방치되고 있다. 동상 위에는 아이들이 올라가 놀고 있는 등 어린이들의 놀이터가 되고 말았다. 이는 베트남에서 '1당 독재' 외에는 구호로만 남고 사실상 버려진 '사회주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하노이의 혁명광장인 '바딘광장'에는 거대한 호치민 묘소가 있다. 이곳은 하노이 최고의 관광명소이지만, 검소하고 격식 없이 살았던 호치민의 삶과 정치철학을 '욕보이는' 잘못된 기념물이라고 생각해, 개인적으로 찾지 않는다(이 점에서 유언에서 자신을 기리는 어떠한 기념물도 만들지 말라고 당부하고 커다란 돌에 'FIDEL'이라는 다섯 글자만 새긴 피델 카스트로의 무덤이 본받을 만하다.).
대신 호치민박물관과 관저는 하노이에 가면 반드시 들르는 곳이다. 호치민박물관은 언제 보아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탁월한 박물관이다. 김일성을 우상화한 조선혁명박물관 등 많은 '국부'들에 대한 박물관과 달리, 이 박물관은 호치민을 신격화하거나 호치민 위주로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민중운동사 속에 호치민과 베트남민족해방운동을 위치시킨 것이 특징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게르니카'다. 호치민, 나아가 베트남과 별 관계가 없는 스페인의 한 바스크마을에서 1937년 벌어진 파시스트의 학살과 이를 주제로 한 파카소의 대작 '게르니카'를 크게 전시해 놓은 것을 보면, 그 넓은 시야와 안목에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다. 인류의 역사의 사슬을 끊고 일어서는 민중의 역사로 형상화한 거대한 조각도 언제 봐도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하지만 하노이 최고의 꽃은 호치민 관저, 특히 그의 서재와 침실이다. 벽 위에는 레닌과 마르크스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몇 권의 책이 꽂힌 책상이 놓인 서재, 그리고 목침과 몇 권의 책이 놓인 그의 침실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진다. 최고지도자가 돼서도 이처럼 검소하게 산 지도자가 있었는가? 아마도 대통령궁을 노숙자 쉼터로 개방하고 월급의 90% 이상을 기부하고 낡은 폭스바겐 비틀을 직접 운전하고 다녔던 우루과이의 대통령 호세 무히카 정도일 것이다.
어려운 민중의 삶 위에서 호화로운 삶을 누리고 있는 많은 제3세계 지도자들, 그리고 젊은 시절 운동을 한 것을 팔아 호의호식하고 있는 많은 우리의 소위 '개혁적' 정치인들이 한 번씩 와서 배워야 한다. 아니 나부터 그 앞에 서면 나의 삶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된다.
호치민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내 자신의 부끄러움이 지나가자, 찾아온 것은 슬픔이다. 이같이 청렴하고 훌륭한 지도자를 이어받은 현재 베트남의 지도자들이 부패했기 때문이다. 특히 아직 살아있는 혁명유공자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며 사익을 채우고 있다고 한다. 국제투명성기구(TI) 조사에 따르면, 베트남의 부패지수는 2024년 현재 41점으로 88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라오스, 미얀마, 태국보다는 나은 것이지만, 중국(43점, 76위)보다도 더 부패한 것으로, 호치민의 후예들이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운 일이다.
이는 1986년 베트남이 경제발전을 위해 도입한 '도이모이'라는 '사회주의적 시장경제'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같은 시장경제 도입으로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하고 있고 2024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4700달러로 세계 100위권 동남아시아 국가 중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에 이어 5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 부작용으로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
교조주의와는 거리가 멀고 그 누구보다도 유연했지만, 호치민은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였다. 그의 관저를 떠나면서, 나는 물었다. 현재의 베트남을 보면 호치민은 뭐하고 말할 것인가? 사회주의를 표방하지만 현재 베트남의 경제체제는 사실상 '국가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과연 박정희와 장제스(장개석)의 '개발독재'보다 더 평등하고, 더 효율적이고, 더 민주적이며, 더 민중적인 것인가? 아니 아직 공식적으로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만큼, 다른 것은 몰라도 최소한 더 평등한가?
베트남이 아무리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세계가 자본주의로 평정된 상황에서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그에 따라 불평등이 심화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이해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호치민의 후예라면, 최소한 부패와 이에 따른 불평등은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다시 7년 전 인터뷰에서 반레가 내게 한 말이 떠올랐다. "나는 프랑스 식민지와 미국의 침략에 의해 부서졌던 나의 조국이 이제는 충분히 아름다워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 열매가 다수 민중에게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베트남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은 평범하고 가난한 농민들의 아들과 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해방과 경제발전의 과실로부터 소외되고 있습니다. 만일, 정말 만일, 이 같은 추세가 개선되지 않고 계속된다면, 베트남 해방을 위해 바친 나의 청춘은 무의미한 것으로 끝나고 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 같은 추세가 개선되는 것을 보지 못 한 채, 2020년 세상을 떠났다. 나는 반레에게 뒤늦은 작별인사를 하며 베트남을 떠났다. "존경하는 반레 선생, 안녕히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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