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재활병원 등급 받으러 와서 기다리는 시간
인공 숲길 따라 걷다 지렁이를 죽였네
나뭇가지로 찔러보며 놀다
몸이 터져버렸네
부모는 내 등급 문제로 빌러 왔지만
나는 통과하지 못했고
더는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지렁이가 꿈틀대듯
온몸이 시큰거렸지만
치졸해져 가는 삶을 아비는 가르쳤네
내 옆에서 아예 앉아 있지 못하는 여자가
판자 위에서 굴러다니고
저런 사람이 등급 받고 혜택받아야지
똑똑히 봐요 좀
무언의 시선 속에 흙냄새가 섞여 들어갔네
엄만 의사에게 눈물까지 보이면서
저거 놔두고 어떻게 죽어요 한탄 중이시고
자존심 이런 거 다 버리고 온 나는
찬 맥주로 가열된 몸을 식히면서
아무리 기어가도
사방이 시멘트로 둘러싸인
인공 숲에서 지렁이는 어디로 나가려고 했을까
밤새부터 지금까지 고열에 땀을 적시며
근육통을 버티다 보니
침대 위에는
내가 죽인 지렁이가 온몸을 비틀어대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네
지나가는 새들에게 먹히라고
나는 묻어주지 않았네
-정노윤, ｢지렁이｣
파스 냄새와 걷는 시간
누군가에게 몸은 아름다움을 가꾸는 오브제입니다. 그런데 또 누군가에게는 생존 수단이기도 합니다. 정노윤은 중복장애인입니다. 자기 한계를 나름 초월한 듯 술자리에서도 눌변을 토해냅니다. 돌아보면 그가 했던 말 대부분은 알아듣지 못한 채 흘려 보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를 기억하는 냄새는 시(詩) 내음도, 인품에서 우러나는 향기도 아니었습니다. 고통을 감쌌던 파스 냄새였습니다. 카프카적이라면 너무 고답적일까요. 벌레로 변신했던 인간의 실존적 고뇌와 소외를 누구보다도 더 깊이 맞닥뜨렸을 그의 시가 그립습니다.
시 ｢지렁이｣는 소위 ‘즉물시((卽物詩)’입니다. ‘사물에 즉하여 짓는 시’, 즉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사물을 골똘히 바라보고 그대로 그림 그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시인의 처지를 시 읽기 열쇠로 삼지 않았으면 합니다. 참, 그런 얘기부터 흘려놓고는 그러지 말라 하니 이게 무슨 헛소리. 다만 ‘지렁이’가 시 제목이자 소재이니 시인의 현실을 빗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면 하는 뜻입니다. 그러면 시인의 삶도 지렁이의 시적 본질도 너무 작아 보입니다. 이 시의 알레고리는 무얼까요. 읽어 달라 기다리고 있는 의미는 무얼까요.
김수영이 즉물시를 이야기 하며 박목월을 상찬했던 일이 있습니다. 둘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는데 4·19혁명 이후 모든 시인이 현실에 눈을 돌릴 때 박목월도 그러했습니다. ｢동물시초｣였습니다. 이 시를 두고 김수영은 당시 보기 드문 현대적 면모를 지녔다 했지요.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박목월의 말입니다. “모든 동물의 얼굴은 고독했다. 언어를 못 가진 것의 그 깊은 침잠.” 다시 정노윤에게 돌아오니 그의 고독이 얼굴을 듭니다. “내 결핍은 몸이 아니라 언어였다”고. ‘파스 냄새’는 또 다른 말이었습니다.
■ 작가 소개 |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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