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일부러' 비싼약 처방해도 따라야 하는 이유는? '성분명 처방' 의무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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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일부러' 비싼약 처방해도 따라야 하는 이유는? '성분명 처방' 의무 없어서

프레시안 2025-12-20 12:08:12 신고

3줄요약

런던의 어느 병원. 의사가 처방전을 건넨다. "아모시실린(Amoxicillin) 500mg, 하루 세 번 드세요." 환자는 약국으로 간다. 약사는 선반을 훑어보고 가장 저렴한 복제약(제네릭)을 꺼낸다. 환자는 5파운드를 낸다. 끝.

서울의 어느 병원. 의사가 처방전을 건넨다. "오구멘틴정 500mg, 하루 세 번 드세요." 환자는 약국으로 간다. 약사는 '오구멘틴'이라는 특정 상품만 줄 수 있다. 환자는 2만 원을 낸다. 그런데 옆 약국에는 같은 성분의 다른 약이 8천 원이다. 그러나 처방전이 '오구멘틴'이라고 적혀 있으니 바꿀 수 없다. 환자는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왜요?"

대답은 없다. 대신 의사 계좌에는 제약회사로부터 '학술 자문료'라는 이름의 돈이 입금된다고 한다.

상품명 처방,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한국 의료계의 진기한 풍경 중 하나는 의사들이 약의 '성분명'이 아닌 '상품명'으로 처방한다는 점이다. 같은 항생제라도 '아모싱'이 아닌 '오구멘틴', 같은 고혈압약이라도 '텔미사르탄'이 아닌 '미카르디스'로 적는다. 이게 왜 문제일까? 간단하다. 상품명 처방은 특정 제약회사의 특정 제품만 팔게 만드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영국, 독일, 프랑스 같은 나라들은 성분명 처방이 의무다. 의사는 "이 성분의 약을 드세요"라고 쓰고, 약사는 그 성분이 들어간 약 중 가장 합리적인 것을 고른다. 환자는 돈을 아끼고, 국가는 의료비를 절감하고, 약사는 전문성을 발휘한다. 모두가 이기는 게임이다.

그런데 한국은 정반대다. 의사는 특정 상품을 지정하고, 약사는 그것만 팔아야 하고, 환자는 더 비싼 값을 치른다. 누가 이기는 게임일까? 딱 한 명, 리베이트를 주는 제약회사와 그것을 받는 의사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라는 아름다운 헛구호

2000년, 한국은 의약분업을 시작하며 이 멋진 구호를 외쳤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참 좋은 말이다. 의사는 병을 진단하고, 약사는 약의 전문가로서 적절한 의약품을 조제한다. 완벽한 분업 아닌가?

그런데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 약사는 여전히 의사가 '상품명'으로 콕 찍어준 약만 팔고 있다. 이게 무슨 전문성인가? 약사는 그저 '포장 뜯는 사람'으로 전락했다. 성분명 처방이 되어야 약사는 비로소 "이 성분은 이 제품이 가성비가 좋습니다" 혹은 "환자분 상태상 이 복제약이 낫겠네요"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게 진짜 전문성이다.

하지만 의사들은 손사래를 친다. "환자 안전을 위해 우리가 약까지 지정해야 한다!" 그럼 영국 환자들은 다 위험에 노출되어 있단 말인가? 독일 의사들은 무능한가? 아니다. 그들은 그냥 리베이트가 없을 뿐이다.

제약회사가 사랑하는 한국 의사들

한국은 제약회사들에게 축복받은 땅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의사에게 돈을 주는 게 범죄지만, 한국에서는 '학술대회 후원금', '연구비 지원', '자문료'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하면 된다. 그리고 그 대가로? 처방전에 자기네 상품명을 하나 더 써달라고 부탁한다.

환자는 이 사슬의 가장 끝에서 지갑을 연다. 복제약이 있는데도 오리지널 약값을 낸다.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약은 수십만 원을 호가한다. 왜? 의사가 그 '상품명'을 처방했으니까.

까놓고 말하자면, 한국 환자들은 약값뿐 아니라 '의사 리베이트 분담금'까지 내는 셈이다. 약국 계산대에서 카드를 긁을 때마다 "아, 이 중 얼마는 의사 선생님 골프채 값이겠구나" 하고 생각하면 기분이 묘하다.

약사들도 억울하다고? 글쎄...

약사 단체들도 목소리를 낸다. "우리도 피해자다! 의사들이 상품명으로 처방하니 우리는 선택권이 없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왜 약사들은 성분명 처방 의무화를 강력히 요구하지 않을까?

사실 약사들도 이 시스템에서 나름의 이익을 챙긴다. 제약회사는 의사뿐 아니라 약사에게도 손을 내민다. '약국 우선 배치', '판매 장려금', '후원' 등의 이름으로. 결국 의사와 약사는 서로 티격태격하면서도, 성분명 처방이라는 진짜 해결책에는 둘 다 소극적이다. 대다수 국민인 환자만 바보가 되는 구조다.

성분명 처방, 왜 안 되는가

기술적으로 어려운가? 아니다. 전자처방 시스템에 성분명 입력란을 만들면 끝이다. 약사가 혼란스러워할까? 천만에. 약사 국가시험에서 가장 중요한 게 약물 성분 공부다. 그들은 이미 성분명을 훤히 꿰고 있다.

그럼 환자가 혼란스러울까? 오히려 반대다. 환자는 "아, 내가 먹는 게 '혈압약'이 아니라 '텔미사르탄(Telmisartan)은 고혈압 치료제 성분이구나" 하고 더 명확히 알게 된다. 약을 바꿀 때도 "이 성분 포함된 약 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문제는 하나다. 기득권. 성분명 처방이 되면 제약회사는 리베이트 줄 이유가 사라지고, 의사는 받을 돈이 사라진다. 그래서 안 하는 것이다. 환자 안전이니, 의료 질이니 하는 건 다 핑계다.

바뀔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면 희망은 별로 없다. 의사 단체는 "전문성 침해"라며 반발하고, 약사 단체는 "실익이 없다"며 소극적이고, 제약회사는 로비를 하고, 정치인들은 표가 무서워 입을 다문다. 그 사이 대다수 국민인 환자들은 오늘도 비싼 약값을 낸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성분명 처방 의무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리베이트를 근절하고, 약값을 낮추고, 의료 전문성을 회복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영국 환자가 웃을 수 있다면, 한국 환자도 웃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약국 계산대 앞에서, 오늘도 한국 환자들은 묻는다.

▲영국 약국의 모습.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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