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그룹의 미래 먹거리 발굴이 녹록지 않다. 정의선 회장이 낙점한 자율주행·미래항공모빌리티(AAM)·로보틱스·수소 등 4대 신사업 추진에 속도조절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자율주행은 해외 기업과의 기술격차를 인정했고, AAM의 상용화 시점은 불투명하다. 두 사업이 가시적 성과를 보이지 못하면서 로보틱스와 수소가 승부처로 부상했다. 단기적 성과를 내기 어려운 미래 사업은 전략을 재조정하고, 제조·제품 중심의 실행 가능한 과제 해결에 무게를 싣는 모습이다. <편집자주>편집자주>
【투데이신문 전효재 기자】현대자동차그룹이 로보틱스와 수소를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낙점하고 대규모 투자를 통해 시장 선점에 나선다. 보행 보조 로봇으로 시작한 ‘로보틱스’의 꿈은 현대차를 ‘전통적 자동차 제조사’에서 ‘인공지능(AI) 기반 로봇·모빌리티 제조사’로 인식을 전환하게 했고, 수소 수요와 공급을 동시에 늘리는 전략으로 수소 생태계의 ‘전 주기’ 활성화도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10일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는 로보틱스·수소 시장을 본격적으로 선점하기 위해 그룹 계열사의 역량을 모으고 글로벌 협업을 강화하고 있다.
美 투자 확대…연 3만대 로봇 생산 공장 구축
올해 내내 제자리걸음 하던 현대차 주가가 12월 초 들어 들썩였다. 12월 1일부터 8일까지 코스피가 3960선에서 4150선까지 약 4.8% 오르는 동안 현대차 주가는 26만1000원에서 31만5500원까지 약 20.8% 증가했다. 현대차를 ‘전통적 자동차 회사’가 아니라 ‘AI 기반 로보틱스·모빌리티 제조사’로 보는 시각이 확산되면서 기업 가치도 재평가받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현대차는 로보틱스의 본격적인 상업화를 위해 발 빠르게 나서고 있다. 정의선 회장은 지난 8월, 2028년까지 미국에 260억달러(약 38조4000억원) 규모의 투자 단행을 발표했다. 지난 3월 발표한 210억달러보다 50억달러(약 7조3900억원) 증가한 수준이다. 늘어난 투자액 중 일부는 미국 내 연간 3만대 규모의 ‘로봇 완성품 제조 및 파운드리 공장’을 설립하는 데 투입할 예정이다.
국내 투자도 이어간다. 지난 11월에는 2026년부터 2030년까지 5년간 피지컬 AI·로보틱스·수소를 비롯한 신사업 분야에 50조5000억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로보틱스를 신성장동력의 축으로 삼고 대규모 투자를 본격화하는 모습이다.
현대차가 미국에 짓는 신규 공장은 보스턴다이믹스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 사족보행 로봇 ‘스팟’, 물류 로봇 ‘스트레치’ 등을 생산하는 거점으로 활용될 전망이다. 특히 ‘아틀라스’는 미국 조지아주 신공장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에 투입해 생산 공정을 지원할 계획이다.
현대차는 로봇 사업 영역을 자체 로봇 생산부터 위탁 생산(파운드리)까지 확대할 방침이다. 로보틱스 산업은 자동차 기업 특유의 양산·품질 관리 능력, 글로벌 협력 네트워크 제조 공급망 역량을 보유한 현대차에 유리하다. 로봇 생산 공정이 완성차 제조와 유사한 장점도 있다. 로봇을 사용하는 회사를 넘어 로봇을 직접 만드는 공장까지 갖추려는 현대차의 계획에 계열사도 발맞춰 대응하고 있다.
현대모비스는 지난 9월 ‘2025 CEO 인베스터 데이’에서 로봇 동작을 제어하는 핵심 부품 ‘액추에이터’를 개발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액추에이터는 로봇 원가의 60% 이상을 차지한다고 알려진 핵심 부품이다. 로봇의 동작을 제어하는 구동 장치로 모터와 감속기, 제어부로 구성돼 자동차 조향장치와 구성이 비슷하다. 현대모비스는 자동차 부품 개발과 양산 경험을 토대로 액추에이터 분야를 시작으로 센서와 제어기, 핸드 그리퍼 등의 영역으로 로보틱스 사업 확장을 검토할 계획이다.
현대글로비스는 스트레치·아틀라스 등 보스턴다이믹스가 생산하는 로봇을 물류 현장에 적극적으로 투입해 사업을 최적화하고 활용 사례를 늘려갈 것으로 전망된다. 현대글로비스는 지난 3월 코엑스에서 열린 ‘2025 스마트공장·자동화산업전’에서 물류 로봇 스트레치를 아시아 최초로 공개하고, 2026년 초 상용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로봇의 현장 적용 사례를 확보해 로봇산업의 외연 확장에 도움을 줄 것으로 전망된다.
현대차의 로봇 개발 전담 부서인 ‘로보틱스랩’은 산업용 웨어러블 로봇과 모빌리티 플랫폼에 집중하고 있다. 어깨 근력 보조 웨어러블 로봇 ‘엑스블 숄더’를 시범 운영하고, 지난 3일에는 자율주행 모빌리티 플랫폼 ‘모베드(MobED)’의 양산형을 최초 공개했다.
모베드는 바퀴 네 개가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자율주행 로봇이다. 360도 제자리 선회와 전방향 이동이 가능하고, 지면 환경에 따라 각 바퀴의 높이를 조절하며 몸체의 흔들림을 최소화한다. 용도에 맞는 모듈을 교체하거나 부착해 배송·안내·서빙 로봇 등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현대차가 2021년 약 1조원을 들여 인수한 보스턴다이믹스는 현대차의 로보틱스 R&D를 담당하는 거점이다. 로보틱스랩이 웨어러블·모빌리티에 집중했다면 보스턴다이믹스는 자율 임무가 가능한 로봇에 주안점을 둔다. 보스턴다이믹스는 AI 기술을 기반으로 휴머노이드 로봇 개발에 집중하고, 현대차그룹은 높은 제조 역량을 바탕으로 양산을 담당한다.
최근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휴머노이드 공장 경쟁에 속도를 내고 있다. 테슬라는 자사 공장에 투입한 휴머노이드 ‘옵티머스(Optimus)’의 판매에 나섰고, 독일 폭스바겐은 중국 칭다오 공장에 중국 업체와 공동 개발한 ‘워커 S 라이트’를 투입해 품질 검사와 볼트 조임 작업을 시험하고 있다. BMW는 미국 스파턴버그 공장에 피규어(Figure)사의 휴머노이드 ‘Figure 02’를 도입했다.
중국 완성차 업체는 더 적극적이다. 광저우자동차, 샤오미, 샤오펑 등이 자체 휴머노이드 로봇을 개발해 여러 산업 현장에 투입했고, 상하이자동차, 베이징자동차, 비야디 등은 로봇 전문 기업들에 전략적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현대차는 보스턴다이나믹스의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를 이르면 연내 미국 HMGMA 공장에 투입해 사람과 로봇이 함께 일하는 생산 현장을 만들 계획이다. 초기에는 부품 적치·이송 등 단순 협업 작업을 수행하고, 2026년부터 용접·도장 등 본격적인 공정까지 단계적으로 확대한다. 장기적으로는 조립 공정의 약 40%를 로봇화할 계획이다.
현대차는 로봇 양산으로 가격 접근성은 높이되 시장 수요에 따라 생산량을 늘려가는 보수적인 접근 방식을 취할 것으로 전망된다. 현대차가 제시한 연 3만대의 로봇 생산량은 강력한 경쟁자인 테슬라와 비교하면 적은 수준이다. 테슬라는 2028년까지 100만대 양산 공장을 추진하고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고객의 니즈를 반영해 자동차를 만들 듯 로봇도 시장의 필요에 맞는 상품을 개발할 수밖에 없다”며 “아직 어떤 로봇 기업도 명확한 전략을 세우지 않은 만큼 현대차도 한 단계씩 구체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수소차 넘어 ‘전 주기’ 솔루션 공급…생태계 구축 속도
“수소는 가능성을 말하는 단계가 아니라 실제 산업으로 확장되는 국면에 들어섰다. 현대차는 전 주기 기술력을 모아 수소 생태계를 현실로 만들어 나가고 있다.”
현대차 장재훈 부회장이 지난 4일 ‘월드 하이드로젠 엑스포 2025’에서 기자들과 만나 한 말이다. 그룹 역량을 결집해 수소 생태계 활성화를 이끄는 현대차의 성과와 의지를 함축한 발언이다.
현대차는 수소전기차 분야에서 글로벌 선두주자로 꼽힌다. 1998년 수소 관련 연구개발 전담 조직을 신설한 이후 지속적인 투자와 연구를 바탕으로 수소 모빌리티 리더십을 강화했다. 대형 수소전기트럭 세계 최초 양산, 수소전기차 전용 모델 ‘넥쏘’의 수소차 세계 최대 판매량 달성 등 이정표를 세웠다. 최근에도 넥쏘의 후속 모델인 ‘디 올 뉴 넥쏘’가 유럽 신차 안정성 평가(유로 NCAP)에서 최고 등급을 획득하고, 중국 광저우시에서 수소버스 224대를 수주하는 등 성과를 창출했다.
수소 생태계를 앞당기기 위해 글로벌 협업 체계도 구축했다. 현대차는 지난 4일 프랑스의 산업용 가스 제조사 에어리퀴드와 전략적 협력을 체결했다. 한국·미국·유럽을 수소 생태계 구축의 핵심 거점으로 삼고 수소 밸류체인 전 과정의 고도화를 추진하는 것이 골자다.
현대차의 최종 목표는 수소차 판매를 넘어 수소 생태계 시대로의 전환을 이끄는 것이다. 수소의 생산부터 저장·운송·충전·활용까지 전 주기 솔루션을 공급하는 ‘토탈 에너지 기업’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2024년 수소 비즈니스 브랜드인 ‘HTWO’를 출범한 것도 그 일환이다. HTWO는 ▲현대차 ▲기아 ▲현대로템 ▲현대글로비스 ▲현대건설 ▲현대제철 ▲현대엔지니어링 등 다양한 계열사가 참여해 수소 관련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현대차는 수소 생산에 자원 순환형 기술을 접목할 방침이다. 현대엔지니어링은 폐플라스틱을 열분해해 순수한 수소를 추출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으며, 현대로템은 가축 분뇨와 음식물 쓰레기 등 유기성 폐기물로부터 생기는 바이오메탄을 수소로 바꾸는 기술을 고도화하고 있다.
아울러 태양광·풍력·수력 등 재생에너지로 생산한 전력을 수전해 기술을 활용해 청정 수소로 전환한다. 현대건설과 현대엔지니어링은 지난 9월 전북 부안군에서 상업용 수전해 기반 수소 플랜트 건설을 완료했다. 2026년부터 하루 1t(톤) 이상의 수소를 생산해 수소 연구시설과 충전소에 공급할 예정이다.
현대글로비스는 육상과 해상에서 수소 유통 네트워크를 강화한다. 육상에서는 생산한 수소를 튜브 트레일러에 저장해 트럭으로 운송하고, 해상에서는 액화수소로 형태를 바꾸거나 암모니아로 화학 변환해 운송한다. 암모니아는 상온에서 쉽게 액화하고 같은 부피일 때 액화수소보다 1.7배의 수소를 저장할 수 있어 수소 운송의 현실적 대안으로 평가받는다.
수소의 활용처도 늘린다. 현대차는 수소를 전기에너지로 전환하는 수소연료전지를 고도화해 트럭·선박·기차·비행기·드론 등 다양한 운송 수단에 적용할 계획이다. 특히 수소 트럭 등 상용차 분야는 수소 생태계 확산의 핵심이다.
현대차는 미국 HMGMA의 물류 운송을 수소 트럭 ‘엑시언트’로 전환하고 북미 지역 수소 밸류체인을 구축하고 있다. 수소 공급, 충전소 구축 등 인프라를 선제적으로 구성하면 다른 운송 수단에도 수소연료전지 적용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계산이다.
철강·화학·정유 산업 등에서 산업용 원료나 연료로 사용하는 산업용 수소도 큰 활용처다. 철강 산업에서는 탄소중립 달성을 위해 철강 제련 과정에서 필요한 환원제를 수소로 대체하는 수소환원제철 기술을 개발 중이고, 석유화학 산업에서는 원유를 정제할 때 나오는 부생 수소를 제조 공정 내 원료로 사용하거나 타 산업에 유통·판매하고 있다.
현대차가 수소 기술 상용화 측면에서 주목하는 분야는 수소 생산이다. 수소가 다양한 산업 분야에 투입되면서 수요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장 부회장은 “수소를 어디에서 어떻게 만드느냐가 가장 중요한 과제이며 기존 연료전지 기술을 역으로 이용해 원가 경쟁력을 확보하는 방안을 집중적으로 보고 있다”고 언급했다. 수소연료전지 기술의 반대는 수전해를 통한 수소 생산이다.
한국자동차연구원 공임모 수소저장충전연구센터장은 “과거에는 화학·철강·시멘트 공정에서 발생하는 부생 수소를 활용하기 위한 논리 중 하나가 수소차였지만, 지금은 다양한 산업에서 수소를 운영·활용하기 때문에 부생 수소가 남지 않는 상황”이라며 “수소차를 충전하는 입장에서는 수소가 부족하다는 인식이 있다”고 설명했다.
현대차는 그간 쌓아온 수소 R&D 경험과 계열사의 역량을 기반으로 수소 생태계 확장에 박차를 가할 방침이다. 미래 에너지 패러다임이 수소로 전환되는 시기에 준비된 에너지 사업자로서 리더십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공 센터장은 “수소 기술이 발전하면 수소를 다루는 다른 산업이 전체적으로 육성되는 효과가 있다”며 “향후 수소 시장이 활성화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래를 보고 투자할 가치가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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