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노규민 기자] '토끼전' '별주부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별주부가 용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토끼를 용궁으로 데려가고, 위기를 느낀 토끼가 간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며 살아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어려서부터 전래동화나 교과서 등을 통해 접해왔다.
판소리에서는 '수궁가'로 칭한다. 우화를 기반으로 한 작품으로, 재미있는 사설과 음악적 구성을 통해 오랜 시간 사랑 받아왔다. 국가를 상징하는 용왕, 이념을 실천하는 별주부, 개인적 삶을 중시하는 토끼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는 약자의 삶을 주목하고 있다.
'수궁가'는 이른 시기부터 다양한 더늠(판소리 명창의 장기로 인정되고, 또 다른 창자들에 의해 널리 연행되어 후대에 전승된 것)이 생성되면서 음악적 완성도를 이뤘고, 많은 명창들에게 물려 지며 여러 유파가 생겨났다.
2026년 1월 1일, 판소리 다섯 바탕 가운데에서 소멸 위기에 놓인 동편제 '수궁가'와 관련, 서울시 무형문화재 판소리 수궁가 보유자인 정의진 명창의 삶과 전승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 '수궁'이 극장에서 개봉한다.
정의진 명창은 어전광대 정창업의 증손녀이자 판소리 명창 정광수의 딸로, 동편제 수궁가의 맥을 이어온 인물이다. 가부장제와 생계, 제도적 한계, 건강 악화라는 현실 속에서도 그는 평생을 걸고 수궁가를 지켜왔다.
연출을 맡은 유수연 감독은 사라져가는 전통예술과 동시대 여성의 삶을 꾸준히 탐구해온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수궁' 이후에는 화제를 모은 드라마 '정년이'의 실존 인물을 다룬 다큐멘터리 연출로도 주목 받았다.
유 감독은 한 영화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판소리를 위한) 완벽한 경에 태어났지만, 여성이라서 그만둬야 했던 그 서사에 관심이 갔다. 경력 단절 30년을 이겨낸 이후 다시 소리를 시작한 정의진 명창은 20년 동안 왕성하게 활동했고, 소리는 점점 좋아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당신이 소리하고 있다는 걸 말하지 못하더라. 동네 사람들에게도 비밀로 하고 자식들이 알까 봐 걱정했다. '왜 숨길까' 호기심이 생겼고, 그게 '수궁'의 시작이었다"고 설명했다.
전통예술과 여성 노동, 생계와 예술의 경계를 관통하는 유 감독의 연출 세계는 '수궁'을 단순한 예술 기록을 넘어 동시대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으로 확장시킨다.
영화는 "이 소리는 나와 함께 사라질 수 있다"는 절박함 속에서 전수자를 찾기 위해 이어가는 정의진 명창의 여정을 밀도 있게 따라간다. 그 발걸음은 단순한 전통 계승을 넘어, 한 인간이 자신의 삶 전체를 걸고 붙잡아온 예술의 기록이 된다.
'수궁'은 정의진 명창 개인의 서사에 머물지 않는다. 이지선, 윤은서, 김다슬, 한은영 등 각기 다른 자리에서 소리를 이어가고 있는 여성 소리꾼들의 삶을 함께 비추며, 전통예술 전승의 현재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노래방 운영과 학교 강의, 품바 공연, 퓨전 무대 등 이들의 일상은 전승이 결코 낭만적인 과정이 아님을 보여준다. 생계와 예술 사이에서 매일같이 선택을 반복하면서도 소리를 놓지 않는 이들의 모습은,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여성 예인들이 감내해온 현실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1월 1일 개봉.
뉴스컬처 노규민 pressgm@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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