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고전은 끊임없이 재해석될 때 비로소 살아 숨 쉰다. 국립극단의 ‘국립청년극단’이 선택한 작품이 ‘미녀와 야수’라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너무 잘 안다고 생각했던 이야기, 디즈니의 이미지로 고정되어 버린 서사를 다시 꺼내 든다.
2026년 1월, 원주를 시작으로 춘천·삼척·강릉·횡성·속초까지 이어지는 17회의 강원 지역 투어는 순회공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청년’과 ‘지역’이라는 두 키워드를 무대 위에서 동시에 실험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국립청년극단은 청년 연극인의 안정적인 창작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탄생했고, 그 첫 여정을 서울이 아닌 원주에서 시작한다. 중심이 아닌 곳에서, 그러나 주변에 머물지 않는 질문을 던지겠다는 선언처럼 보인다.
이번 ‘미녀와 야수’는 대중적으로 소비되어 온 축약본이 아닌, 1740년 가브리엘 수잔 바르보 드 빌레느브의 원작을 기반으로 한다. 요정의 세계, 신분의 비밀, 변화와 화해의 여정이 켜켜이 쌓인 서사는 아동극의 외피를 벗고, 관계와 타자성, 내면의 괴물성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연출을 맡은 이대웅은 동화를 보여주는 데서 멈추지 않고, 연극적 문법으로 사유의 지점을 확장한다.
특히 2019년 초연 당시 주목받았던 ‘야수가 장미나무가 되는 설정’은 이번 무대에서도 핵심적인 정서 장치로 작동한다. 이는 변신의 판타지라기보다, 시간과 기억, 욕망이 응축된 이미지에 가깝다. 인간은 언제 괴물이 되고, 언제 식물이 되는가.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상처 입은 존재를 우리는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질문은 장면 사이를 유영하며 관객의 감각에 스며든다.
무대 위에는 지난 8월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20명의 청년 배우가 오른다. 이들의 에너지는 ‘젊음’이라는 추상적 수사가 아니라, 실제 신체의 밀도와 호흡으로 드러난다. 섬세한 움직임과 유기적인 장면 전환, 상징적 오브제를 다루는 감각은 이 작품이 고전을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음을 증명한다. 고전은 이들에게 답이 아니라, 끝까지 밀어붙여야 할 질문이다.
연출가 이대웅은 이번 공연에서 연극적 문법을 강조한다. 동화적 이미지에 갇히지 않고, 신체와 오브제, 공간의 긴장을 활용해 원작의 정서와 상징을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이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관객 스스로 감정과 관계를 체험하게 만드는 장치다. 고전이 현대의 무대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 순간이다.
국립청년극단의 출범은 제도적 실험이기도 하다. 청년 예술가에게는 공공 무대라는 실질적 기회를 제공하고, 지역 관객에게는 고품질 공연예술 접근성을 확대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원주를 거점으로 한 이 실험이 강원 전역으로 확장되는 과정은 한국 공연예술 생태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시도로 읽힌다.
‘미녀와 야수’는 사랑 이야기다. 그러나 그 사랑은 외모를 넘어 내면을 본다는 교훈으로 봉합되지 않는다. 낯선 존재를 이해하려는 노력, 두려움과 화해 사이에서 흔들리는 감정, 변화의 고통이 관객의 심리를 시험한다. 국립청년극단의 ‘미녀와 야수’는 이 오래된 이야기를 통해 지금 우리가 어떤 세계를 살고 있는지를 묻는다.
공연은 또한 지역성과 젊음을 동시에 드러낸다. 강원도 6개 지역을 돌며 진행되는 순회공연은 관객을 만나는 행위일 뿐 아니라, 지역 예술 생태계의 순환을 활성화하는 역할을 한다. 청년 배우들은 지역 관객과 직접 만나며 자신의 창작 역량을 실험하고, 관객들은 새로운 예술적 경험을 얻는다. 이 상호작용은 지역 문화의 지속성과 젊은 예술가의 성장을 동시에 담보한다.
고전이 다시 살아나는 순간은, 어쩌면 이런 만남에서 시작된다. 시대와 세대를 넘어 질문을 던지고, 관객의 감각과 사고를 자극하는 순간. 국립청년극단의 ‘미녀와 야수’는 바로 그 장면을 무대 위에서 구현하고자 한다. 고전은 완성된 답이 아니라,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살아 있는 텍스트임을 증명하는 자리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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