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경제=고예인 기자 | AI 열풍이 메모리 시장의 주인공을 바꾸고 있다. 그동안 스마트폰·모바일 전용으로 여겨졌던 저전력 D램(LPDDR)이 AI 서버의 핵심 카드로 부상하면서 예상과 다른 방향 탓에 수급 불균형과 가격 급등을 현상을 불러오고 있다.
K-메모리 기업들이 고대역폭메모리(HBM) 투자에 쏠리면서 LPDDR 공급 축소가 구형 LPDDR4X까지 가격을 20% 이상 올리는 뜨지만 못하는 기묘한 호황을 맞고 있다.
◆ LPDDR의 부상, 엔비디아가 쏘아올린 신호탄
AI 데이터센터의 최우선 과제는 이제 '성능'이 아니라 '전력'이다. 대형 언어모델(LLM) 학습·추론 수요 폭증 속에서 랙당 전력 한도 안에 얼마나 효율적으로 시스템을 구성하느냐가 핵심 설계 변수가 됐기 때문이다. 엔비디아가 ARM 기반 고성능 CPU '그레이스 슈퍼칩'에 서버용 DDR5 대신 LPDDR5X를 채택한 것은 이런 흐름을 반영한 결정이다. 그로스리서치는 "이 결정이 하이퍼스케일러 전반의 LPDDR 도입을 촉발한 방아쇠"라고 평가했다.
LPDDR5X는 DDR5보다 동작 전압이 낮고 전력 관리가 세밀해 시스템 수준 전력 소모를 줄이면서도 세대 진화에 따른 전송 속도 개선으로 성능 경쟁력을 확보했다. 엔비디아가 주도하는 소캠(SOCAMM) 같은 새로운 서버 메모리 폼팩터도 LPDDR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여러 LPDDR5X 칩을 하나의 모듈로 묶어 기존 RDIMM을 대체하는 구상으로 전력 효율과 공간 활용을 동시에 개선할 수 있다.
◆ HBM 올인이 부른 LPDDR 공급 붕괴
문제는 메모리 제조사들의 포트폴리오 재편이다. AI 붐으로 고수익 HBM에 투자가 쏠리면서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은 전체 생산 캐파를 HBM과 최신 DDR5·LPDDR5X에 집중했다. HBM은 전체 D램 비중 10% 미만이지만 매출 비중이 30%를 넘을 정도로 수익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 여파로 스마트폰용 LPDDR4X는 감산·라인 전환 대상이 됐다. LPDDR 전체 공급 여력이 줄어드는 와중에도 AI 서버용 LPDDR5X 수요는 폭증했다. 2025년 2분기 이후 일부 사양의 LPDDR4X 계약가격이 전 분기 대비 20% 이상 뛰었고 구형 메모리가 최신 제품 수준의 가격대로 역전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여전히 LPDDR4X만 지원하는 중저가 기기들이 많아 완제품 업체들은 설계 변경 부담을 감수하기보다 비싼 LPDDR4X를 사겠다는 선택을 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HBM3E 개발 지연으로 밀린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전영현 부회장 주도의 쇄신에 나섰다. 차세대 LPDDR6 조기 양산(2025년 하반기), LPDDR5X 기술력 강화, 구형 LPDDR4X의 빠른 감산이 핵심 전략이다.
반면 SK하이닉스는 HBM 시장 우위를 바탕으로 균형잡힌 접근을 취한다. LPDDR6-PIM(메모리 내 AI 연산) 같은 고도화 기술 개발, 그리고 DDR5 고용량화에 적극 나서고 있다. 업계 최초로 256GB DDR5 RDIMM이 인텔 제온 6 플랫폼 인증을 획득했으며 이 제품은 기존 128GB 모듈 대비 추론 성능 16% 향상, 전력 소모 18% 절감을 실현했다.
이상권 SK하이닉스 부사장은 "고성능·저전력·고용량 메모리 수요 확대에 '풀 스택 AI 메모리 크리에이터'로 대응하겠다"고 강조했다.
SK하이닉스는 구형 LPDDR4X 감산도 삼성보다 점진적으로 진행하며 고객 이탈을 최소화하는 전략을 취한다. 두 회사 모두 엔비디아 소캠과 ARM 서버 수요 증대에 대비한 서버용 LPDDR5X 공급 체계를 구축 중이지만 삼성은 '빠른 추격', SK하이닉스는 '안정적 확장'을 각각 목표로 하고 있다.
LPDDR의 전략적 가치는 계속 커질 전망이다. ARM 기반 서버, 엣지 AI, 자율주행차, 웨어러블 등 저전력 기기가 늘어날수록 LPDDR은 기본 옵션이 된다. 동시에 생성형 AI 모델 복잡성 증가에 따라 고용량·고성능 DDR5의 중요성도 커진다. 온디바이스 AI 본격화 시 LPDDR5X·LPDDR6 수요는 구조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 HBM·DDR5·LPDDR의 삼중 경쟁
관건은 메모리 업체들이 HBM·DDR5·LPDDR의 균형을 어떻게 맞추느냐다. 업계는 HBM 공격적 투자와 함께 AI 데이터센터용 고용량 DDR5 확충, LPDDR5X·LPDDR6 다층 포트폴리오 구축, 구형 LPDDR4X의 점진적 감산을 병행해야 한다고 진단한다.
중국 CXMT 같은 후발 업체의 추격도 변수다. 만약 중국 업체들이 고급형 LPDDR·DDR5 양산에 성공하면 글로벌 가격 판도가 요동칠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AI 슈퍼사이클이 메모리 산업에 던진 메시지는 명확하다”며 “HBM만으로는 AI 시대 메모리 방정식을 풀 수 없고 고성능 DDR5와 저전력 LPDDR이라는 다층 축이 필수”라고 말했다. 이어 “LPDDR은 저전력 표준으로 모바일·서버·엣지로 확산되고 DDR5는 고용량·저전력화로 AI 데이터센터 핵심 인프라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AI 슈퍼사이클에 따라 삼성·SK하이닉스가 이 세 시장의 균형을 얼마나 정교하게 조정하느냐가 K-메모리의 다음 10년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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