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혜선 편/노들장애인야학 기획 | 봄날의책
노랑 표지를 본 순간 반했다. 개나리꽃 같은 환한 바탕에 풀잎처럼 휘날리는 초록 필체가 장쾌하고 천진하다. 책의 부제는 이렇다. ‘공부하고 투쟁하고 일하는 노들야학 30년의 기록.’ 배우고 저항하는 이들이 쌓은 시간의 힘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광년을 달려 당도한 목소리가 야생 들판의 밤눈처럼 이 연대의 우주에 박혀 있다. 우선 밥부터 먹이자는 일상의 수저 소리, 젠체하지 않는 글솜씨에 웃다가 그 한 글자 한 글자를 쓰는 것이 누군가에겐 가장 절박한 소망이었단 사실에 내 안일한 글들이 부끄러워진다. 말과 글과 연결이 사람의 생명이고 공동체의 표정이란 걸 깨우친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친구야, 같이 소리치는 방법을 배우자! 사랑의 바람이 절실할 때 학교에 가듯 이 책을 펼친다.
폴 B. 프레시아도 저/문경자 역 | 문학동네
사람마다 속절없이 붙들리는 단어가 있다면 나는 천체의 이름에 약하다. 그중 천왕성은 음악가가 광학망원경으로 발견한 최초의 행성이고, 천왕성의 불규칙한 궤도를 통해 수학적 계산만으로 해왕성이 발견되었기에 내게는 어딘가 퀴어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표지는 나의 애착 컬러인 청록. 그런데 아무리 내 집 마련이 어렵거니와 왜 얼음과 메탄에 둘러싸인 차디찬 우주 부동산까지 갔을까? 문득 슬플 때마다 의자를 옮겨가며 노을을 봤다던 소혹성의 꼬마가 떠오른다. 어떤 슬픔은 하루에 무려 마흔네 번이나 노을을 봐야 하고, 어떤 가슴은 수치심과 공포에 무수히 관통당해 몸과 성별, 심지어 영혼마저 사라진다. 그 빈 자리에 사유와 글쓰기가 찾아온다. 오 년간 저자의 신문 칼럼을 모은 이 책에서 약점은 경계를 넘는 힘이 된다. 상처는 꿈으로 가는 웜홀을 뚫어 새 이름과 살 곳을 마련해준다. 지배도 순응도 없이 다만 자기의 색으로 빛나기 위해. 나도 그 집에 가고 싶다.
칼 구스타프 융 저/김세영, 정명진 역 | 부글북스
올해 초여름, 장편소설의 초고를 끝내고 내가 나에게 선물한 책이다. 저자의 사생활이 그리 가지런하지만은 않아서 읽기 시작하는 데 망설였다. 하지만 이 사람만큼 개인의 고유한 성숙과 영혼의 존재를 확신하는 이도 드물다. 제목처럼 빨간 가죽으로 장정한 노트에 십육 년간 쓰고 그린 기록을 엮은 책이다. 그런데 대체 이건 어떤 상황을 묘사한 걸까? 꿈? 환상? 신화? 정신분열? 살면서 팔만여 사례의 꿈을 분석한 전문가가 자기의 무의식은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한다. 자신의 모든 이론은 이 책에서 잉태되었다는 구절을 보니 아마도 글쓴이는 수시로 자기의 영혼과 마주 앉아 이렇게 물었을 듯싶다. ‘내 삶이 네게 도움이 되니?’ 죽은 지 오십 년이 지나서야 출간된 이 비밀 노트를 모델 삼아 나도 오랜만에 꿈 일기를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먼저 탐험했던 이의 조언을 되새겼다. 인간의 마음은 자연의 일부이고, 이 수수께끼는 끝이 없음을.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이산가족을>| 프로그램
KBS
일만 년 후쯤, 미래의 누군가 한반도에 살았던 인류 집단을 연구한다면 이 영상이 중요한 자료로 꼽힐 듯하다. 우연히 하나를 봤는데 동영상 알고리즘이 자꾸 추천해준다. 누가 봐도 혈육 사이가 분명한 두 사람이 퀴즈를 풀듯 하나씩 기억을 맞춰간다. 몸에 난 흉터와 그 상처를 입었던 어릴 적 상황, 왜 그때 나를 버렸냐는 원망과 날 업고 피난 갔던 둘째 언니의 안부, 네 성씨는 김 씨가 아니라 허 씨라는 애틋한 호통. 자분자분 서로 존칭을 쓰다 가족임을 확인한 순간 호흡처럼 터져 나오는 ‘엄마, 오빠, 아버지, 동생아!’ 숨 가쁜 설움과 감격, 고통, 그리움. 인간이 지닌 모든 감정이 클로즈업된 얼굴에 물밀듯 쏟아진다. 옛날 사람 특유의 말투와 정겨운 사투리가 듣고 싶어 클릭하지만, 눈물이 솟구쳐 오래 보진 못한다.
다니엘라 페스
이 음악을 추천해준 사람은 콜롬비아에서 왔다. 우리는 어느 가을에 만나 예기치 않은 산행을 했다. 나는 구두를 신고 돌길을 오르면서도 끊임없이 옆 사람을 보며 놀랐다. 인종도, 삶의 궤적도 다른 두 사람의 취향이 신기할 정도로 비슷했다. ‘이것도? 설마 이것도 좋아해요?’ 우리는 서로가 품은 호감의 무늬를 조심스레 꺼내봤다. 며칠 뒤 그 사람은 내가 좋아할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이 음반의 링크를 보내왔다. 이탈리아어를 기반으로 하지만 노래 속 가사는 세상에 없는 언어라 했다. 뜻 모를 소리와 몽환적인 전자음향이 고대 샤먼의 주술처럼 들린다. 뮤직비디오에는 그 숲에서 자란 듯한 식물이 나온다. 꼭 이 음악이어야 하는 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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