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을 마무리하며 올해 최고 흥행 영화 순위를 살펴봤다.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이 한국 영화 ‘좀비딸’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한국 영화시장에서 일본 영화가 연간 흥행 1위를 기록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이 작품만 있는 게 아니다.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이 5위에 오르며 일본 애니메이션 두 편이 각각 568만, 342만 관객을 동원해 천만 관객에 육박하는 수치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극장판 진격의 거인 완결편 더 라스트 어택’, ‘명탐정 코난: 척안의 잔상’,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우리들의 공룡일기’까지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며 명실공히 저패니메이션 붐이 형성됐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올해에만 나타난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스즈메의 문단속’이 극장가를 휩쓴 2023년의 경험에서 봤듯이 현재 한국 극장가에서 가장 강력한 팬덤을 보유한 장르는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한국의 젊은 관객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열성 팬이 된 현상은 시간은 비싸지고 선택은 더 예민해진 동시대의 조건과 맞닿아 있다. 이들이 극장을 떠난 이유는 영화의 완성도가 아니라 체험의 부재 때문이다.
2030세대는 메시지를 주입하는 서사보다 스스로 발견하는 감각을 선호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이 지점을 잘 파고든다. 교훈을 강요하지 않고 세계를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주인공은 목적을 잃고 윤리는 불완전하며 결말은 종종 허무하다. 그 여백을 채우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체인소 맨: 레제편’의 흥행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목표 없는 주인공, 주변 인물들의 반복되는 배신과 죽음, 더 나빠지는 삶이 영화에 그려진다. 인권과 젠더 감수성의 기준으로 보면 불편한 요소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이 서사는 젊은 관객에게 묘한 쾌감을 준다. 삶이 개선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노력하면 보상받고, 올바르면 구원받는다는 도식은 작동하지 않는다. 그 대신 폭력과 액션이 터뜨리는 즉각적인 감각이 전면에 놓인다. 이는 청년세대가 느끼는 동시대적 리얼리즘에 가깝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더 이상 오타쿠의 은신처가 아니다. 2030세대에게 일본은 여행과 대중문화로 이미 친숙하며 팬데믹 시기 OTT를 통해 일본 애니메이션은 일상적 시청 경험이 됐다. 극장에서 이를 극장용 버전으로 다시 보는 행위는 자연스러운 연속이다.
한국의 극장은 현재의 급격한 변화를 잘못 판단해 왔다. 메시지와 완성도를 강화하면 관객이 돌아올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집에서 눕고, 멈추고, 재생하는 관람 방식은 이미 뉴노멀이 됐다. 이를 밀어낼 힘은 ‘더 나은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경험’에서 나온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대형 스크린과 사운드가 만드는 감각적 밀도, 그리고 혼자서는 성립하지 않는 집단적 반응을 만족시킨다. 극장의 표값 논란은 결국 체험의 문제로 환원된다.
‘어쩔수가없다’의 골든글로브 3개 부문 후보지명만으로는 타개하기 어려운 한국영화의 어두운 터널 한가운데서 체험이 있고 발견이 있으며 참여할 여지가 있는 극장의 재설계가 절실해진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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