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강남·목동 등 전국 각 지역 학군지 부모들 사이에서 '4세·7세 고시'라 불리는 영어유치원, 학원 등의 영·유아 대상 입학시험 금지법을 둘러싼 반발 여론이 고조되고 있다. 과도한 경쟁을 완화한다는 법 취지가 무색할 정도의 심각한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이유에서다. 시험이 사라진다 해도 또 다른 방식의 학습 수준 평가가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주장인데 현재 등장 가능성이 높은 시험 외 학습 수준 평가 방식으론 추천제, 구술시험 등이 지목되고 있다. 전부 투명성·공정성이 담보되지 않은 심각한 선별 방식들이다.
아동학대 우려한 '입·테 금지법'에 한숨 커지는 학부모들 "불공정·불투명 꼼수 등장 우려"
국회 교육위원회는 지난 9일 전체회의를 열고 '학원의 설립·운영 및 과외교습에 관한 일부개정법률안(이하 학원법 개정안)'을 여·야 합의로 처리했다. 개정안의 핵심 내용은 영어유치원, 학원 등에서 영·유아(만 3세~미취학 아동) 모집 시 수준별 배정을 위한 시험 또는 평가 행위를 금지하고 위반 시엔 정부가 영업정지, 등록 말소 등 행정 제재나 과태료 처분을 내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번 법안은 본회의 등의 절차를 거쳐 내년 6월 쯤 시행 될 예정이다.
여·야가 극심한 갈등 속에서도 서둘러 개정안 처리에 합의한 것은 영·유아 대상 영어 입학시험이 보편화된 것도 모자라 '4세·7세 고시'라 불릴 정도로 과열 양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과열된 교육열이 아동학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끊이지 않았다. 지난 8월 국가인권위원회는 "극단적 선행학습 형태의 조기 사교육이 아동의 휴식·놀이권을 침해한다"며 제도 개선을 권고한 바 있다.
그런데 강남·목동 등 전국 각 지역 학군지 부모들 사이에선 국회의 초당적 협력에 의해 등장한 이번 개정안을 두고 회의적인 반응이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나마 시험 덕분에 공정성·투명성을 유지했던 유명 영어유치원·학원 등록이 점차 불공정·불투명해질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이미 수준 별 학습이 보편화 된 상황에서 가장 확실한 수준 평가 방식인 시험이 금지되면 또 다른 평가 방식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현재 등장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는 평가 방식으론 추천제, 구술시험 등이 언급되고 있다.
서울 강남구에 거주하는 이유진 씨(34·여·가명)는 "현재 5살 된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 입·테(입학 테스트의 줄임말)가 사라진다는 말을 들으니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며 "유명 학원이 유명해진 이유가 단순히 커리큘럼이 좋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비슷한 수준의 아이들이 한데 모여 그에 걸맞은 수업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학부모들이 선호하는 것이고 학원들도 이 부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동안 꾸준히 입·테를 시행했던 것이다"고 설명했다.
이어 "만약 입·테가 금지되면 학원 입장에선 비슷한 수준의 아이들을 모으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을 고민할텐데 어떤 방식을 내놓든 과연 시험만큼 공정할 지 의문이다"라며 "주변 엄마들 사이에선 기존 학부모의 추천이나 구술시험이 가장 많이 언급되는데 추천제는 아이 수준 보다 부모의 인맥에 좌우되는 것이고 구술시험도 강사의 주관적 판단이 크게 반영되기 때문에 공정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고 토로했다.
서울 양천구에 거주하는 홍연희 씨(38·여·가명)는 "시험이 금지되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입학 테스트는 진행할 수밖에 없다"며 "수준 별 맞춤학습이나 선행학습이 없으면 누가 그 비싼 돈을 주고 영어유치원이나 유명 학원에 보내겠나"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주변 엄마들 사이에선 기존에 아이를 보내고 있거나 과거 보냈던 학부모의 추천을 받아 정원을 채우거나 일단 선착순 등록을 받고 추후에 반 배정 식으로 구술시험을 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린다"며 "정보에 빠르거나 넓은 인맥을 가진 학부모가 앞으론 유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맞벌이 부부 자녀들은 아무래도 불리한 측면이 많을 것이다"고 전망했다.
"학부모들은 추천제·구술시험 기정사실화…인맥·정보 많은 둘째맘·돼지엄마 입지 커질 듯"
학원업계와 정치권에서도 추천제나 구술시험 도입을 예측하는 목소리들이 여럿 나오고 있다. 고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앞서 교육위 전체회의에서 구술 레벨테스트가 가능하다는 부분을 지적하며 이를 보완하기 위한 추가 입법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고 의원은 "이번 개정안은 구술로 하는 레벨테스트에 대한 제재 장치가 없다"며 "(법안의) 구멍이 너무 클 경우에는 유아 사교육 시장의 과열을 금지시키고자 하는 원래의 의도가 반영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추가 입법해서 이 부분을 반드시 막겠다"고 강조했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 소재 한 유아 영어학원 관계자는 "이번에 통과된 개정안 내용을 보면 보호자의 사전 동의를 받아 교육활동 지원을 목적으로 한 관찰 면담 방식의 진단적 성격 평가는 가능하다고 돼 있는데 앞으로 이 부분을 활용하는 학원이 많이 등장할 것이다"며 "다만 객관적 증거 자료를 따로 마련할 수 없다 보니 일부 학부모들이 반발하고 나설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학원마다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 소재 한 유아 수학학원 관계자는 "입·테 금지법 이야기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학부모들 사이에선 추천제 이야기가 유독 많았다"며 "학부모들은 학원의 커리큘럼 수준을 유지하면서 수준이 비슷한 아이들끼리 공부하도록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도 첫째를 초등학교에 보내고 둘째도 같은 코스를 밟는 엄마들에게 다른 엄마들이 의지하려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며 "아무래도 완전히 시험이 사라지고 추천제를 도입하는 학원이 늘면 학원 정보나 원장·강사 인맥이 넓은 속칭 '돼지엄마' 분들의 입지가 커지지 않을까 싶다"고 전망했다.
교육 분야의 전문가들도 사교육 과열 현상을 잠재우기 위한 시도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또 다른 풍선효과에 대한 안전장치 마련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형평성과 공정성, 투명성이 희석될 우려를 이유로 들었다. 양정호 성균관대학교 교육학과 교수는 "영·유아 대상 입학시험 금지는 과열된 사교육을 완화하려는 취지에서 긍정적이지만 시험이 사라지면서 추천제나 구술시험 등 또 다른 선별 방식 등의 꼼수들이 다수 등장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며 "이 경우 부모의 인맥이나 정보력에 좌우될 수 있어 교육의 형평성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에 법 시행과 함께 이에 대한 명확한 가이드라인과 감독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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